<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4)

1980년 1월 배상욱 장관 주재하에 열린 체신부 간부회의에서는 공사화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었는데 찬성하는 간부는 거의 없었다. 배장관이 상공부 산하의 공업단지관리청을 수출산업공단으로 민영화함으로써 보다 능률적인 조직으로 만들었던 것을 예로 들면서 찬성쪽으로 유도하는 발언을 했으나, 공사로 넘어갈 것이 분명한 일부 기술자들을 제외하고는 호응하는 간부는 별로없었다. 평소 공사화를 주장하던 정규석차관도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체신부 간부들의 본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신분에 대한 불안이 주원인이었다. 당시는 12.12사태 직후의 안개정국으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매우 불안한 시국이었다. 게다가 근거없이 교통 부와 통합설이 나돌기도 했다. 때문에 공사로 넘어가게 될 사람은 신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으며, 체신부에 남게 될 사람은 그들대로 공사가 떨어져나갈 경우 빈약해질 체신부의 위상에 대해 불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느닷없이 체신부가 교통부와 통합된다는 얘기가 떠돌았어요. 그런데다가 전화사업이 떨어져 나가면 체신부는 뭘 하느냐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따라서 일부 공사로 넘어가게 되는 사람들은 공사화를 지지했지만 남게되는 사람들은 반대했어요. 심지어 우리더러 죽으라는 얘기냐고 하는 사람도있었죠. 체신부 사람들은 원래 피해의식이 많잖아요."이미 차관으로 승진해 있던 정규석의 증언이었다.

그후 광주민주화운동과 신군부의 등장으로 정국이 경색되는 동안 공사화 문제는 잠자고 있다 1980년 9월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전두환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경제비서실 팀에 넘겨졌던 것이다.

한편 전기통신사업의 경영체제를 공사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김재익수석과 합의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오명비서관은 먼저 김기철 체신부장관을 인사겸 찾아가서 앞으로 체신사업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사화 문제를 끄집어 냈다. 그러한 목적으로 그는 김 장관을 두세 차례 방문했다. 또한 김재익 수석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장관 에게 공사화의 당위성을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하곤 했다.

그러는 한편 오비서관은 체신부 실무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공사화 문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실무자로서 서기관 이계철과 사무관 이재선이 지목 되어 갔다.

"현재 공사화에 대한 체신부 의지는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검토는 지난 20년 동안 했던 것 아닙니까? 이제는 체신부 의지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윽박지르는 말에 대해 체신부의 실무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체신부는 공사화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2주간의 시간을 드릴 테니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어 오세요. 김기 철장관께는 이미 말씀드려 놓은 사항이니 장.차관께 보고드린 다음 갖고 오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는다면 청와대에서 직접 실행계획을 만들어서 추진하겠소. 오비서관은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국보위가 해체된 후이긴 하지만 당시는 아직도 비상시국이었다. 때문에청와대 비서관의 말한마디면 다들 알아서 처신할 때였다. 더구나 통신사업 경영체제에 대해 검토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이미 받아놓고 있던터라 체신 부는 서둘러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고 관계국장과 외부전문가 3인을 위원으로 하는 경영체제개선위원회를 구성하여 공사화작업을 서둘렀다.

한편 1980년 9월초에 체신부장관으로 임명된 김기철은 오랫동안 천주교평신 도협의회장을 역임한 신앙인으로서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통신과는 무관 한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가 3대 국회에서 정책질의를 통해 전기통신사업의 경영형태를 공사형태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1952년에 발족 한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NTT)를 모델로 생각해서 그러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으므로 공사화 문제에 대해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만있을수 없었다. 더구나 청와대 비서실 팀의 부드러운 대화속에 숨겨진 강력한 의지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공사화가 불가피함을깨달은 그는 공사화 방침을 자신의 정책목표로 삼기로 하고 구체적인 추진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3대 국회때 예결위에서 정책질의를 하면서 전신전화사업은 관기업으로는 발전하기 어려우니 공사형태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당시의 체신부장관에게 주장 한 일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는 정부에서 그럴 준비가 안돼 있어 이루어지지 못했죠.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내가 체신부장관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작업만큼은 내가 이뤄놓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체신부 간부들의 의견을 물었더니, 공사화 문제는 역대 장관들의 추진사항이었지만 아직까지 안됐다며 부정적으로 나왔어요. 그러나 내 소신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설립문제와 함께 부지런히 작업을 시켜서 대통령께 보고를드렸더니 흔쾌히 응낙을 하셨어요. 이것이 내 소신이라고 강력히 보고를 드렸어요. 두세차례 보고를 드렸죠." 김기철 장관의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성품에 대해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의사를 남에게 강요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제나 겸손하게 상대 편의 이야기를 잘 듣는 그는 상대편의 이야기를 유도해낼 줄도 알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특이한 대화법을 터득하고있었다. 오명비서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체신부쪽에서 공사화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김재익 수석한테 그런 점은 많이 배웠어요. 그분은 상대방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설득하는데 아주 천재적이었어요. 절대로 남에게 강요하는 일이 없었어요. 그분과 한시간 가량 얘기하면 모든 사람이 이것은 내 소신이요 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던겁니다.

김기철장관도 이것은 내 소신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언했고, 대통령께도 그렇게 말씀드렸었죠." 1980년 12월19일 김기철 장관은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선"이라는 결재문서에 전두환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고, 이로써 전기통신사업 경영체제의 공사화가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 공사화에 대해서는 청와대 내무는 물론 남덕우총리까지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 통신에 대해 유별나게 관심을 많이 가졌던 전대통령의 내락도 받아놓은 상태여서 별다른 이견이 없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전대통령은 내심 걱정이 되었던 듯 김장관을 만날 때마다 "정말 공사 화해도 되는 거요?"하는 말로 걱정과 격려의 뜻을 동시에 표시했고, 한국통신 초대사장 이우재에게는 결재를 하긴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국영기업체가 부실경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 한 걱정이었던 것이다.

"통신사업 경영체제 개선"안에서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단독신분.단독보수제를 채택하고 국가에서 경영하는 안(제1안), 보수와 예산회계제도의 탄력성을 유지하며 국가에서 경영하는 안(제2안), 공사로 전환하는 안(제3안)등 세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그중 제3안을 채택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는데, 나머지 두가지 안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공사의 발족일을 체신부의 원안에서는 1983년 1월 1일로 잡았으나 하루라도 앞당기자는 청와대 오명 비서관의 주장에 따라 1982년 1월 1일로 1년 앞당겨졌던 것이다.

1981년 3월 체신부장관이 경질되어 김기철장관 후임으로 외교관출신인 최광 수가 부임했다. 그는 오랜 외교관 생활을 거친 다음 국방부차관, 대통령 비서실장 무임소장관 등의 요직을 섭렵하여 행정 능력이 탁월하고 의전에 밝은 인물로 알려져 있어 체신부장관으로서는 거물급 장관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설립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앞둔 체신부 주변에서는 그의 장관 취임을 매우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는 공사 설립작업은 물론 체신부의 발전을 위해서도 몇가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우선 그는 공사 설립작업의 추진 기구를 개편했다. 종전에는 통신사업경영체 제 개선위원회와 실무자회로 되어 있던 추진 기구를 공사설립위원회와 실무 반으로 개편하는 한편 위원의 구성을 새롭게 했다.

즉 체신부의 관련국장과 체신부 주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 위원 중 체신부 주변의 전문가 대신 유관 부처의 간부들로 대체했다. 이때 공사설립 위원으로 위촉된 면면을 살펴보면 체신부 기획관리실장 배호원, 보전국장 이희두 중앙통신지원국장 유택로, 통신시설사무소 설계부장 고재남, 청와대 경제비서관 오명(뒤에 홍성원으로 교체), 경제기획원 예산관리관 김무용(문 희갑으로 교체), 재무부 재산관리국장 이용성(이동호로 교체), 총무처 행정 관리국장 정문화, 전기통신연구소 선임연구부장 경상현 등이었고 위원장은 체신부차관이 맡았다.

공사설립위원회는 공사의 정관 및 규정의 작성, 설립비용 등 공사 설립에 관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기능을 가졌는데, 유관 부처의 간부가 위원으로 위촉됨에 따라 부처간의 협조가 원활히 이뤄질 수 있었다.

전기통신사업 경영체제의 공사화가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됨에 따라 맨먼저 서둘러야 할 일은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즉, 공사 설립에 관한 기본법인 공사법의 재정과 공사 사업 경영의 근거가 되는 전기통신법의 개정이 선행되어야 했다.

공사법의 초안은 이미 오래전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정작업은 순조롭게진행되어 1981년 3월 한국전기통신공사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그러나 전기통신법의 개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체신부는 당초에 이 법을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분리하여 새로운 법을 제정하기로 하고, 두 법안을 마련하여 경제장관회의 심의까지 통과시켰으나 "전기통신기본법"이라는 법안의 명칭에 대해 법제처에서 이 견을 제시함에 따라 양 부처간의 의견 조정에 들어갔으나 그것이 이루어지지않은데다 공사 설립 일정에 쫓겨 전기통신법의 개정으로 대신했는데, 이 법의 개정이 1981년 4월에 이뤄짐으로써 공사 설립을 위한 법적 장치가 모두이뤄졌던 것이다.

"공사가 분리되는 것을 계기로 해서 전기통신법을 둘로 쪼개는 작업을 했어요. 하나는 전기통신기본법이라 해서 전기통신 정책에 관한 사항을 담고, 또 하나는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이라 해서 전기통신사업자를 규제하는 사항을 담은 법률을 제정하기로 하고 두 법안을 마련해서 각 부처와의 협의를 끝내고경제장.차관회의까지 거쳐 법제처와 최종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이견이 나왔어요. "전기통신기본법"이라는 용어가 못마땅하다.

그리고 마지막 입법회의에 통과시키려면 검토할 시간이 없다. 따라서 두 법으로 쪼개는 작업은 나중에 하고 우선 공사 발족과 관련된 부분만 고치도록 하자고 해서 전기통신법의 개정으로 낙착되고 말았죠. 경제장.차관회의까지거친 법안이 그렇게 되어 버려 몹시 안타까웠는데, 결국은 공사를 발족시키고 나서 1983년에 두 법으로 나눠 제정하고 말았죠." 당시의 법률 개정작업의 실무 책임자였던 전무국 사업관리과장 이인학의 주장이었다. 전기통신법의 개정으로 공중전기통신사업의 경영은 한국통신이, 전기통신에 관한 정책의 수립은 체신부가 담당케 되었다. 한편 공사법에서는 신설된 공사의 명칭을 애초에 예정했던 한국전신전화공사에서 한국전기통신공사(Korea Telecommunication Authority;KTA)로 바꾸었는데, 이는 전신전화(Telegraph & Telephone)라는 개념에서 전기통신(Telecommunication)으로 좀더 범위를 넓히자는 학계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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