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 투자가 매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단순 기술개발보다 이를 관리할 혁신경영 체계를 갖추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AI 경쟁 무게중심이 기술 확보에서 성과 창출로 옮겨가는 만큼, 표준화된 경영 시스템 확보 여부가 기업 경쟁력을 가를 것이라는 진단이다.
국제표준화기구(ISO) 혁신경영기술위원회(TC279) 의장단은 8일 전자신문과 인터뷰에서 한국 기업과 정부에 혁신경영 국제표준 도입을 주문하며 이같이 밝혔다. ISO/TC 279는 혁신경영 국제표준인 ISO 56000 시리즈를 개발하는 국제위원회로, 최근 서울에서 국내 첫 총회를 열었다.
요한 클레르 ISO/TC279 의장은 “기술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수단”이라며 “AI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뛰어드는 기업은 파일럿과 비용만 쌓을 뿐 지속적 가치를 만들지 못한다”고 말했다. 연구개발(R&D) 집약도가 높은 한국의 경우 “남은 질문은 기술에 얼마나 투자하느냐가 아닌, 그 투자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가치로 전환하느냐”라고 진단했다.
해법으로는 혁신경영시스템 표준 ISO 56001을 제시했다. 리더십·자원 배분·조직문화를 전략 목표에 맞춰 정렬해 AI가 유행 추종이 아닌 전략 실행 수단이 되도록 하는 틀이다. 제품 개발 전 단계에 윤리·보안·편향 점검 지점을 내장함으로써 내부 거버넌스 루프를 만든다.
클레르 의장은 “AX 시대 연료는 경영진 직관이 아닌 현장에서 생성되는 객관적 데이터”라며 “리더가 하향식 특권을 내려놓고 데이터가 위계를 대체하면 실무진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애자일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매그너스 칼슨 교수(전 스웨덴 국립표준청 의장)는 한국식 성장 모델이 전환점에 섰다고 진단했다. 수직적 구조와 '빨리빨리' 문화는 패스트 팔로어 시대의 엔진이었지만, 기존 성공 공식이 무의미해진 AI 환경에서 퍼스트 무버로 전환할 때는 구조적 제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ISO 56000은 혁신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닌 나침반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칼슨 교수는 노키아를 반면교사로 꼽았다. 노키아가 휴대폰 주도권을 잃은 것은 기술이나 R&D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혁신 활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조직 사일로와 내부 경쟁, 왜곡된 소통이 핵심 정보가 경영진에 닿는 것을 막았다.
그는 메모리 반도체·전기차 배터리·자동차 분야 한국 대기업에 대해서도 “개인 리더의 비전이나 기존 성공 제품에 의존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시장 변화가 전환을 강요하기 전에 국제표준 기반으로 혁신 활동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벨렌 수아레스 ISO 스타트업 표준분과위원장은 중소기업 역시 경영 전략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공공 지원은 스타트업이 혁신을 개발하도록 돕는데 그치지 않고 혁신경영 역량을 갖추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이다.
수아레스 위원장은 “스타트업이 데스밸리를 넘지 못하는 것은 아이디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업으로 전환할 조직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정부 지원은 추가 행정 요건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혁신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도구를 제공하는 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TC279는 이를 구체화한 스타트업·중소기업용 가이던스 ISO 56014를 개발하고 있다.
박준호 기자 junho@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