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판결문 데이터 공개, 찬반을 넘어 '설계'를 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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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진 가천대 법과대학 교수(한국정보법학회장)

인공지능(AI) 시대에 판결문 데이터 공개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의 흑백논리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이니 무조건 전면 무료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민감한 개인정보가 많으니 공개는 위험하다는 주장도 문제의 일부만 본 단순화다. 미국·영국·독일·일본은 각국의 법체계와 사법문화에 따라 서로 다른 공개 방식을 취하고 있고, 단일한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흐름은 분명하다. 판결문 공개가 단순한 열람 서비스에서 기계판독 가능한 데이터 제공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공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게 공개할 것인가'다. 판결문 공개는 재판공개 원칙, 국민의 알권리, 사법감시, 법률서비스 혁신의 관점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됐다. 판결문은 더 이상 종이문서가 아니라 법률서비스 혁신의 핵심 데이터이자 사법 투명성의 기반이며, 국민의 법률접근성을 높이는 공공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공개하지 않는 것에도 비용이 따른다. 공식적 접근경로가 없으면 데이터는 비공식적으로 수집되고, 자본력 있는 일부 기업만 데이터 경쟁에서 앞서가며, 결국 데이터 독점과 접근격차가 심화된다. 한국어 법률 데이터 없이 한국의 법률 AI는 발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국가 경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법원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정확하지 않다. 판결서 인터넷 열람·검색서비스 등을 통해 공개 범위와 접근성은 분명히 확대돼 왔다. 그러나 현재의 개별 열람 중심 방식으로는 AI 학습, 판례 분석, 양형 연구 등에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PDF 파일 수백만 건의 단순 제공이 아니라, 쟁점·법령·주문·판단이유를 일정한 구조로 담은 표준화된 기계판독형 데이터세트다. 이는 리걸테크의 원재료를 넘어 법치주의의 인프라다.

그렇다고 위험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판결문에는 인간의 분쟁과 고통, 범죄와 피해, 가족과 재산이 담겨 있고, 비실명 처리를 통해 제공되더라도 다른 정보와 결합하면 재식별 가능성도 있다. 법관 프로파일링과 재판부 쇼핑, 변호사법과의 충돌, 데이터의 국외 이전도 현실적 쟁점이다. 바로 그렇기에 판결문 데이터 공개는 어느 하나의 잣대가 아니라 다층적·다각적 접근을 통한 종합적 판단을 요구한다. 개인정보 보호, 사법 신뢰, 산업 혁신, 국민의 알권리, 데이터 주권이라는 여러 가치를 층위별로 살펴 정교하게 조율해야 한다.

구체적 해법은 차등 설계다. 일반 국민에게는 개별 판결문 검색·열람의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연구·개발·상업적 활용에는 목적별 라이선스를 두어 위험 수준에 따라 조건을 달리해야 한다. 특히 AI 학습 목적 이용은 데이터가 모델에 흡수되어 사후 회수가 어려운 만큼 별도의 고위험 심사체계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비실명화는 AI 시대에 맞게 고도화하되, 재식별 시도·데이터 재판매·목적 외 이용에는 강력한 사후 제재를 두어야 한다. 법관 프로파일링도 전면 금지와 전면 허용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법관 개인의 순위화·상품화는 제한하되 법원 혹은 재판부 단위 공익적 사법분석과 학술연구는 보장하는 정교한 기준이 필요하다.

개인정보 문제는 공개를 반대할 논거가 아니라 공개 방식을 정교하게 설계해야 할 이유이며, 상업적 이용은 금지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다. 판결문 데이터세트 공개의 수혜자는 리걸테크 기업만이 아니다. 국민, 법률가, 연구자, 법률구조기관, 사법정책 담당자 모두 수혜자다. 이제 논의는 신중론에서 방법론으로 전환돼야 한다. 복잡성을 이유로 멈출 것이 아니라, 그 복잡성을 감당할 제도와 기술, 책임 있는 공개 모델을 만드는 것, 그것이 법치주의의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최경진 가천대 법과대학 교수·한국정보법학회장 kjchoi@ga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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