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장기간 이어진 벤처 혹한기를 지나 회복 국면에 진입하고 있지만, AI·딥테크 중심의 투자 편중과 글로벌 연결 약화, 회수시장 병목 등 구조적 과제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플랫폼 중심이던 생태계가 AI·반도체·로보틱스 중심으로 급격히 재편되면서 '딥테크 강국'으로 진화하고 있지만, 그 이면의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 공동대표는 최근 부산 이스포츠경기장에서 28일 열린 '2026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에서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벤처 겨울을 지나 회복기로 가고 있다”면서도 “투자 양극화와 글로벌 연결 약화, 회수시장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임 대표는 지난 7년간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변화의 핵심을 '플랫폼에서 딥테크로의 이동'으로 정의했다. 과거 컬리, 야놀자, 직방 등 플랫폼 기업이 주도하던 투자 시장이 이제는 AI·반도체 기업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7년 전만 해도 100억원 이상 투자유치 사례 가운데 딥테크 비중은 10% 수준에 불과했다”며 “지금은 사실상 대부분이 딥테크 투자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구조 자체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실제 투자 회복 신호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해 벤처투자는 전년 대비 14% 증가했고, 벤처캐피탈과 신기술사업금융회사를 합친 투자 건수는 약 8500건으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임 대표는 “최근 발표된 올해 1분기 데이터를 보면 펀드결성 규모가 분기 기준 사상 최고 수준까지 올라왔다”며 “2022년 이전 정점 시기보다도 더 높은 수준으로 확실한 회복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회복의 동력 상당 부분이 정책자금 확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임 대표는 “모태펀드와 성장금융 출자가 크게 늘면서 시장을 떠받치고 있다”며 “국민성장펀드와 AI 투자 확대도 회복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정부 자금 공급이 과도해질 경우 밸류에이션 거품 우려도 존재한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투자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AI·딥테크 집중 현상이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분석한 올해 상반기 공개 투자 사례에 따르면 100억원 이상 투자유치 딜은 총 57건, 약 2조7000억원 규모였다. 이 가운데 약 95%가 딥테크 분야였으며, AI 반도체와 대규모언어모델(LLM) 관련 분야에만 약 60%가 집중됐다. 리벨리온, 업스테이지, 퓨리오사AI 등 이른바 'AI 삼총사'를 비롯해 홀리데이로보틱스, 엑시나, 디노티시아, 보스반도체 등 주요 대형 투자 사례 상당수가 AI·반도체 기업이었다.
반면 생태계 저변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초기기업 투자 비중은 감소하고 있고, 수도권 집중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임 대표는 “예전에는 수도권 집중도가 70%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80% 수준까지 올라왔다”며 “초기 투자도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창업자 소외 문제도 짚었다. 그는 “전체 창업자 중 여성 비중은 늘고 있지만 벤처투자를 받은 여성 창업자 비중은 오히려 2%대 수준까지 떨어졌다”며 “올해 주요 투자 딜 가운데 여성 창업자는 3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연결 약화 역시 우려 요인으로 꼽았다. 과거 컬리, 야놀자, 직방 등의 대형 투자 라운드에는 해외 투자자 참여가 활발했지만 최근 대형 딜은 국내 자본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임 대표는 “과거 세쿼이아, 골드만삭스 등 글로벌 자본이 적극 참여했지만 최근 1000억원 이상 투자유치 사례 상당수는 국내 자본 중심”이라며 “글로벌 자본은 단순 투자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 연결 역할도 한다는 점에서 다시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회수시장도 여전히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우아한형제들, 하이퍼커넥트 같은 글로벌 M&A 사례가 최근 크게 줄었고 여전히 IPO 중심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며 “대기업 인수 활성화와 글로벌 M&A 확대, 기업형벤처캐피탈(CVC) 규제 완화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새로운 흐름으로는 'K-디아스포라' 현상을 꼽았다. 미국 현지 창업이나 미국 법인 전환(플립)을 택하는 한국계 스타트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임 대표는 현재 이 같은 기업이 약 200개 수준이라고 추산했다.
그는 “한국계 창업자들이 글로벌 VC 투자 유치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흐름이 빨라지고 있다”며 “실제 개발과 고용은 국내에서 하면서도 해외 법인이라는 이유로 지원 사각지대에 놓이는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새 정부 정책에 대해서는 기대와 과제를 함께 제시했다. 그는 '모두의 창업', AI 3대 강국 전략, 국민성장펀드를 '스타트업 정책 3종 세트'로 평가하며 “6만명 이상이 몰린 모두의 창업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이벤트로 끝나지 않고 실제 창업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중요한 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하는 AI 스타트업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느냐”라며 “정부는 단순한 자금 공급을 넘어 스타트업 성장을 막는 규제를 해소하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 대표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과제로 △투자 양극화 해소 △글로벌 연결 강화 △회수시장 활성화 △민간 중심 생태계 재설계를 제시하며 “이제 한국 스타트업의 다음 무대는 글로벌”이라고 말했다.
한편 28일부터 29일까지 부산에서 열리는 이번 '2026 스타트업 생태계 컨퍼런스'에는 국내 주요 VC와 AC, 대기업 오픈이노베이션 조직 관계자 등 약 200여명이 참석한다. 업계는 투자 회복세 속 AI 중심 재편, 글로벌 진출, 회수시장 개선 등을 놓고 생태계 방향성을 집중 논의할 예정이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