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이 멈추는 순간 가장 먼저 웃는 건 다름 아닌 중국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뿐만 아니라 D램·낸드플래시 전 영역에서 삼성전자의 선단공정 가동률은 이미 최대치에 달했다. 반면,8 수요 대비 공급은 역대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수요 중심 반도체 시장에서 파업으로 생산 일수가 하루라도 줄면 결국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중국 메모리업체다. 단순한 노사 분쟁이 아니다.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주도권 경쟁의 분수령 정중앙에 삼성전자의 노사 갈등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8시간만에 수백억 증발…“빈자리는 중국 몫”
생산 차질의 파괴력은 이미 숫자로 증명됐다. 삼성전자 노조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평택사업장 집회 당일 하룻밤(야간 교대조 기준 22시~06시), 단 8시간만에 파운드리는 58.1%, 메모리는 18.4%의 생산 무빙 감소가 각각 발생했다. 가장 보수적인 추정치를 적용해도 야간조 단 한 타임에 수백억원대 생산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총파업이 현실화할 경우의 파괴력은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노조는 예고한 18일간 파업으로 30조원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며 공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0일 1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파업이 있더라도 생산 차질없게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미 가동률이 최대치에 달한 상태에서 파업으로 인한 캐파 손실을 내부 대응만으로 메우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교수는 “파업이 실제로 발생하지 않아야 하지만, 발생하더라도 생산의 전면적인 중단은 절대로 안 된다”며 “최소한의 생산 규모는 유지하는 선에서의 부분 파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실적 발표에서 공개한 수치는 파업의 심각성을 추가로 보여준다. 현재 선단공정 라인 가동률은 최대 수준에 도달한 상태다. D램은 서버향 제품 중심으로 전분기 대비 10% 초반, 낸드는 20% 초반대로 증가하며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HBM은 물론 반도체 자체가 없어서 팔지 못하는 상황이다. 공급 부족을 우려한 수요 기업은 이미 내년도 물량까지 선주문을 넣고 있다. 현재 접수된 수요만으로도 공급 격차는 올해보다 내년에 더 심화될 전망이다.
경쟁사도 마찬가지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최근 국회에서 “중국을 빼고 HBM을 공급할 수 있는 회사가 전 세계에 딱 3개밖에 없다”며 “공급 부족이 저한테는 즐거운 이야기지만 이게 영원히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면 공급을 빨리 늘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공급을 늘려야 할 절박한 시점에 삼성전자의 파업은 오히려 공급을 줄이는 역설이다.
빈자리를 노리는 중국은 이미 달리고 있다. HBM·D램·낸드 전 영역에서 정부 지원 아래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자급률 확대를 위해 약 3440억위안(약 64조원) 규모의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기금 3기'를 조성하고 올해부터 투자를 집행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중국 창신메모리(CXMT)의 D램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3%에서 올해 2분기 5%로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내년에는 10%까지 비중이 치솟을 것으로 전망된다. 낸드플래시 분야의 양쯔메모리(YMTC)는 세계 출하량 비중이 2025년 1분기 처음으로 10%를 돌파한 데 이어 3분기에는 13%에 육박했다.
델·HP 등 글로벌 PC제조사들이 중국산 메모리를 채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더욱 심각한 신호다. 이미 메모리 가격 상승으로 PC 판매가를 높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목소리가 삼성전자는 물론 LG전자에서도 나오기 시작했다.
권오경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석좌교수는 “파업이 강행돼 글로벌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단기적으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에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는 중국의 메모리 산업이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 전체의 글로벌 신뢰도가 단 한 번의 파업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매출 손실보다 무서운 '신뢰 손실'…노사, “대승적 차원서 합의점 도출해야”
손실은 단순 매출에서 끝나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현재 주요 고객사들과 다년공급계약(LTA)을 체결한 상태다. 납기를 지키지 못할 경우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금과 고객 이탈이라는 연쇄 손실로 이어진다. 파업을 결정하는 것은 노조이지만, 결국 그에 따른 리스크는 결국 회사에 전가된다.
실제 노조가 앞서 공개한 무빙율 등 생산 관련 정보는 대외비에 해당한다. 회사의 이익은 물론 경쟁력, 신용 등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삼성전자는 노조에 내부 생산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지 말 것을 강하게 경고하며 유사 행위를 반복하지 말라는 약속을 요청했다. 파업을 회사 신뢰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세계 최초 HBM4 양산 출하를 막 완료한 시점이라는 점도 노조가 공세를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3분기부터 HBM4 매출이 전체 HBM 매출의 절반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글로벌 AI 반도체 주도권 경쟁의 최전선에서 파업이 겹치면 단기 손실을 훨씬 넘어서는 시장 신뢰도 타격으로 이어진다.
이종호 서울대 교수(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무형 손실의 파괴력을 직접적으로 짚었다. 이 전 장관은 “이미 수요기업과의 공급계약이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을 것인데, 파업으로 인한 공급 불이행은 금전적 손실 뿐만 아니라 신뢰도를 잃게 될 것”이라며 “노사 모두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자명하다”고 우려했다.
이어 “신뢰도 하락과 경쟁력 손실 등 무형의 손실 부분이 유형의 손실보다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수요기업인 AI 서비스 업체의 시설투자는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며 “노사의 원만한 합의만이 신뢰도 추락을 막을 수 있을 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역설했다.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파급이 국가 경제 전체로 번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김기승 부산대 교수는 파업이 삼성전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가 노조에 밀려 요구를 들어주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계열사를 거쳐 현대차는 물론 전 산업으로 확산하는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과도한 임금 인상 기대가 전 분야로 번지면 지불 능력을 초과한 기대 심리가 모든 산업의 임금 인상 압력으로 확산되고, 결국 피해는 서민에게 돌아간다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반도체 산업을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 권 교수는 “반도체만이 아니라 모든 산업을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해야 할 것”이라며 “임시방편인 대책에 불과하다”고 정치권의 주장을 일축했다. 송 교수 역시 “법률 만능주의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가져왔다”면서 노사간 합의점 도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불가피하게 반도체를 필수공익사업으로 지정하더라도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전 장관은 “반도체를 어떤 측면에서 필수공익사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근거를 잘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불확실한 근거는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소지가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류근일 기자 ryuryu@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