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인공지능(AI)을 두려워한다. 내 일이 사라질까 봐, 오랜 시간 쌓아온 전문성이 한순간에 대체될까 봐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을 조금 다르게 던지고 싶다. AI는 정말 '일'을 없애는가, 아니면 '일의 형식'을 바꾸는가.
1980년대 초반, 우리 집에는 기획 시즌만 되면 아버지의 직장 후배들이 찾아와 합숙했다. 그들은 전지를 사다 놓고 자로 줄을 긋고, 괘도에 붙일 표를 손으로 그리며 밤을 새웠다. 당시 기업 기획서는 손으로 만들어야 했고, 보고 자료를 만드는 데 상당한 물리적 노동이 필요했다. 합숙은 치열한 토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줄을 긋고 표를 맞추고 글자를 정렬하는 데 드는 시간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그 풍경은 사라졌다. 컴퓨터와 엑셀이 등장하면서 보고서를 만드는 물리적 작업은 급격히 줄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하던 '기획'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장을 분석하고 방향을 설정하며 자원을 배분하는 사고의 과정은 그대로 남았다. 사라진 것은 수작업이었고 남은 것은 사고였다.
나는 1997년부터 인터넷 기획을 해왔다. PC통신 하이텔 포럼을 기획했고, 다음에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었으며, 넥슨에서 모바일 플랫폼을 설계했다. 지금은 NC AI에서 AI 서비스를 기획하고 있다.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스마트폰으로, 그리고 AI로 매체는 계속 바뀌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고객의 페인포인트를 추적하고, 인간의 본성을 관찰하고, 타깃을 정의하고, 서비스의 차별성을 설계하는 일. AI 역시 이 연장선상에 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평균 이상의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낸다. 보고서 초안, 코드의 기본 구조, 디자인 시안, 마케팅 카피처럼 많은 중간 단계의 작업을 대신할 수 있다. AI는 '중간값'을 안정적으로 산출하는 데 탁월하다. 그러나 탁월함은 평균에서 나오지 않는다. 탁월함은 기존 패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패턴을 깨뜨리는 데서 나온다. AI가 과거를 요약한다면, 인간의 탁월함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데 있다.
시장도 냉정하다. 평범한 결과는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 실제 수익과 영향력은 결국 구별되는 수준, 즉 차별성에서 발생한다. AI가 평균 수준을 빠르게 만들어낼수록, 인간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더 높아진다. 앞으로 대체되는 것은 직업 그 자체라기보다 '평균적인 수행 능력'일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평균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균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AI는 평균을 대체할 것이고, 기업은 평균에 의존한 조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NC AI에서 바르코를 운영하며, 이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장치가 아니라 사람이 창의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반복적이고 노동집약적인 시간을 줄여주는 업무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AI는 인간의 일을 빼앗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어야 한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숙련 중심의 작업이 줄어들수록,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자연스럽게 사고와 기획, 즉 본질적인 역량으로 이동하게 된다. 과거에는 도구 사용 능력이 서툴러 본질적인 사고 역량이 가려졌던 사람과, 도구 활용 기술은 좋지만 사고 역량은 떨어지는 사람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화려한 PPT 스킬이나 능숙한 엑셀 수식이 때로 본질적인 기획력인 양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AI가 스킬의 영역을 평준화하면서, 이제는 탁월한 사고력을 가진 인재를 찾아내기가 훨씬 유리해졌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AI로 탁월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에 달려 있다.
임수진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 초거대AI추진협의회원·NC AI 최고사업책임자(C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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