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선]반도체와 '근원적 경쟁력'

'근원적 경쟁력 회복'

최근 2~3년 동안 기업 최고경영자(CEO) 신년사에서 많이 등장하는 얘기다. 사업의 근본을 되새겨 어려움을 돌파하자는 취지다. 시장 불확실성이 클 때, 이 말처럼 당연하면서도 와닿는 게 없다.

반도체 분야에서 근원적 경쟁력이라 하면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DS부문장)이 먼저 떠오른다. 2024년 10월의 일이다. 기대치에 못 미친 3분기 잠정실적 발표 후 전 부회장 이름으로 이례적 입장문이 발표됐다.

당시 전 부회장은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쳤다”며 “무엇보다, 기술의 근원적 경쟁력을 복원하겠다”고 사과와 다짐을 담았다.

전 부회장은 반도체의 근원적 경쟁력을 '기술과 품질'이라고 봤다. 기술과 품질에 대한 신뢰는 고객을 만족시키고 결국 선택받게 하는 핵심 요소다. 단순한 시장 원리이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메모리로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난항을 겪었다. 30년 넘게 지켜온 '메모리 왕좌'를 한때 경쟁사에 내주기도 했다.

전 부회장 입장문 발표 후 1년이 넘은 지금, 상황이 바뀌었다.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존재감을 다시 찾았다. 전 부회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HBM4는 고객들에게 '삼성이 돌아왔다'는 평가까지 받으면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여줬다”고 밝혔을 정도다.

슈퍼 사이클이라 불리는 시황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기술 역량을 키우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노력이 없었다면 과연 그 혜택을 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결국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게 답이었다.

근원적 경쟁력을 개별 기업이 아닌 산업 전체로 확장해보자. 최근 반도체 시장이 초호황이다.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메모리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다. 천정부지로 가격이 오르면서 정보기술(IT) 시장 전반에 영향력이 막강해졌다.

지금은 혁신 없이도 시장 수요만으로도 산업이 성장하는 형세다. 생산 능력만 잘 조절하면 떼돈을 벌 만하다. 실제 주요 메모리 제조사들은 역대급 영업이익을 지속 경신하고 있다.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다. 마치 모두가 '스스로' 근원적 경쟁력을 회복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단기적 성과에 매몰돼 미래를 대비하지 못함을 경계해야 한다. 반도체의 근원적 경쟁력인 기술 혁신 투자에 머뭇거려질 수밖에 없다. 당장 돈이 쌓이니 미래 대비에 눈이 가지 않는다. 지금의 호황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 따른 병목 현상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망각할 수 있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을 법도 하다. 그러나 물이 빠지면 배에 뚫린 구멍이 보일 것이다. 흘러 나간 물처럼 근원적 경쟁력이 흩어져 나간 자리다. 호황을 즐겼던 딱 그 시간만큼 기술은 도태되고 혁신의 기회는 잃게 된다.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이 있다. 편안할 때 안주하지 말고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메모리 공급 부족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AI 거품 우려도 여전하다.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만큼 '위기의 미래'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확보한 수익을 어떻게 기술 초격차로 이어갈지 고민할 때다. 호황기에 벌어들인 수익을 연구개발(R&D)에 쏟아 불황기에도 '근원적 경쟁력'을 유지하는 게 반도체 업계 오랜 공식이다.

Photo Image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브랜드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