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병 팔릴 때마다 독립자금 '쑥쑥'…활명수에 담은 청년 민강의 꿈

1897년 급체와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적지 않던 시절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활명수'가 등장했다.

궁중 선전관이던 민병호 선생이 개발한 이 약은 아들 민강이 동화약방(현 동화약품)을 설립하며 세상과 만났다. 그리고 동화약방은 약을 조제하는 공간인 동시에 항일 네트워크의 거점으로 활약했다.

동화약품은 25일 동화약방 창업 터인 서울 본사에서 초대 사장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의 평전 출판 기념회를 개최했다. 그동안 활명수 브랜드를 주제로 한 책이 출간된 적은 있지만 초대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 사장의 삶을 조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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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준 동화약품 회장이 25일 서울 본사에서 열린 민강 초대 사장 평전 출판기념회에서 인사 말씀을 하고 있다. (사진=배옥진)

이 자리에는 윤도준 동화약품 회장과 유준하·윤인호 각자 대표가 참석했다. 민강 사장 후손들과 동성고등학교, 이화여고, 서울대 약학대학, 대한약학회 관계자 등 약 80여명이 참여해 민강 선생의 뜻을 기렸다.

동화약품은 당시 민강 초대 사장이 약 판매가 아닌 독립운동을 위해 세운 기업이다. 1909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해 국권 회복 운동에 뛰어들었다. 기업 활동으로 벌어들인 돈을 독립 자금으로 사용하고 회사 조직은 항일 네트워크 거점으로 활용했다.

민강 사장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한성임시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했다. 동화약방에서 국민대회준비 자금 출납을 맡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같은 해 만세운동 격문 수령 과정에서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옥고로 건강이 악화됐으나 출옥 후에도 동화약방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 거점으로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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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활명수는 단순한 소화제가 아니었다. 한 병 가격은 설렁탕 두 그릇과 막걸리 한 말을 살 수 있을 만큼 고가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꺼이 약값을 냈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건너가 활명수를 판매해 자금을 마련했다. 동화약방의 영업은 항일 투쟁의 또 다른 방식이었다.

민강 사장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산업의 토대를 닦는 데도 이바지했다

1907년 소의학교(현 동성 중·고등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1918년 조선약학교(현 서울대 약학대학) 설립에 참여했다. 약을 만드는 기술과 사람을 기르는 교육의 기틀을 함께 다졌다.

민강 사장이 1931년 급성 뇌염으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화약방은 맥을 이었다. 독립운동으로 인한 외압 속에서도 1937년 민족 기업가 보당 윤창식 사장이 인수해 명맥을 유지했다. 활명수는 129년을 맞은 현재 국내 최장수 의약품으로 남아 있다.

이번 평전에는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강 사장의 친척인 민금봉 선생의 생애도 담겼다.

민금봉 선생은 동화약방에서 거주하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학업하던 중 항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피검됐다. 2019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동화약품 관계자는 “민강 사장은 일제시대 국권찬탈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기업가이자 교육가, 독립운동가”라며 “이번 평전 출간을 계기로 민강 초대 사장의 활동들이 더욱 널리 알려져 후대에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배옥진 기자 withok@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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