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종료됐다. 이번 정상회의에 세상이 주목한 이유는 재출범한 트럼프 정부가 주도하는 관세 분쟁에 맞선 중국의 대응이 국제경제에 미칠 직접적인 파장 때문이었다. 정면충돌이 초래할 부정적 결과에 부담을 느낀 양국 정상은 미국이 펜타닐에 부과된 관세를 20%에서 10%로 인하하고, 중국은 미국의 대두 수입 재개와 희토류 수출 통제 정책을 1년간 유보하는 선에서 갈등을 봉합했다.
국내적으로는 한미 정상회담의 핵심 의제인 관세 협상의 타결 여부와 내용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최종 협상 결과에 대한 양국의 공동발표까지 넘어야 할 장벽이 남아 있더라도 미국에 대한 직접투자 비용과 방식, 한국 자동차에 대한 관세 적용 비율 등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한 듯하다. 이에 더해 핵연료로 기동하는 잠수함 보유 필요성에 미국의 동의를 받아낸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 안보의 자강력을 증대시키는 플러스 효과로 작용할 것이다.
APEC은 1989년 밥 호크 호주 총리가 한국을 방문해 아태지역 경제공동체 추진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현 21개 회원 경제권은 자유주의 규범과 가치에 기반한 무역, 투자, 협력을 통해 역내 회원국의 공동 이익을 증진한다는 원칙과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APEC 기간에 진행된 한미, 미중 정상회담의 긍정적 성과에도, 이번 정상회의는 APEC의 존재 가치와 미래에 의문을 더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연속해서 노출했다.
첫째,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의 불참과 미국이 빠진 경주 선언문의 채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중국과의 정상회담 후 1박 2일의 방한을 마치고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이 회원국 사이의 협상과 합의를 중시하는 다자주의가 아닌 힘을 기반으로 개별 국가와의 양자 회담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에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자유로운 국제무역질서 유지에 필수적인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해온 미국이 철수한 나머지 정상만의 선언문은 결속력과 구속력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개방적 지역주의와 다자주의를 지향하는 APEC과 달리 폐쇄된 국가주의가 득세하는 현 국제질서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둘째, 미중 담판의 들러리로 전락한 정상회의를 들 수 있다. 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는 개도국은 2020년까지, 선진국은 2010년까지 관세 장벽을 제거한다는 역사적 선언문을 채택했다. 비록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자유주의, 다자주의, 지역주의를 지향하는 APEC 역사 중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APEC은 마닐라 선언, 오사카 선언, 경주 선언 등을 통해 그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분투해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APEC은 미중 패권경쟁과 강대국 정치의 결과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아태지역 국가가 주도하는 APEC에 불만을 품은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 시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아태지역에서 자국 주도 하의 경제 통합을 주도했으나 1기 트럼프 행정부가 탈퇴하며 TPP를 무산시킨 바 있다. 미국의 공백을 노린 중국은 ASEAN 회원국과 한국을 포함한 15개 지역 국가와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협정인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결성해 아태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TP)을 주도하는 일본까지 합치면 이미 아태지역은 강대국이 과시하는 힘의 경연장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참석 여부가 APEC의 흥행을 결정하는 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셋째,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보유를 승인한 미국의 정치적 고려와 향후 한미동맹 재조정과 관련된 사항이다. 패권은 단지 패권국이 주도하는 경제 질서의 확장만을 통해 유지되지 않는다.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을 주도한 영국은 1860년 프랑스와의 코브든-슈발리에(Cobden-Chevalier) 상업조약을 통해 유럽에서 자유무역 레짐을 확장했는데 이 조약의 주요 동인은 두 나라가 협력을 통해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유럽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국 이후 자유무역질서를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한 미국 또한 냉전 시대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동맹국에만 자유무역의 수혜를 제공했다. 위의 사례는 경제적 요인이 아닌 정치적 동인이 패권 질서 형성에 더 중요한 고려 사항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백악관은 군사 관계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무역, 관세, 자원 등 글로벌 밸류체인의 포괄적인 재조정을 통해 동맹 관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 미국 보수 강경파의 머릿속에는 핵연료로 무장한 한국의 잠수함이 중국을 봉쇄할 목적으로 인태지역 곳곳에서 잠항하는 구상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미국 혼자만의 쇠퇴가 미국 패권의 몰락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패권의 몰락은 패권국 자체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체제와 동맹시스템의 해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한 무역, 관세 분쟁을 통해 아직 미국 패권의 막강함을 파악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의 패권 추구 방식이 바뀐 것과 패권 자체가 쇠락한 것의 차이를 구분하고 달라진 패권 추구 방식에 적응하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는 자유주의 국제무역질서의 보편화라는 원래의 설립 취지와 달리 강대국 정치의 회귀, 중상주의적 국가관의 재등장, 동맹의 재조정과 연루의 위험성 증가 등 국제질서 재편기에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총망라된 무대였다. 한국은 APEC 기간 개최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핵추진잠수함의 확보를 통해 한국의 자강 능력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는 활로를 열었다. 동시에 미국의 대중국 전선에 더 깊이 연루될 수 있는 리스크가 증가하는 부담도 떠안았다. 이제 동맹의 가치를 입증해야 호전적으로 변한 패권국의 우산 아래서나마 비를 피할 수 있는 국제질서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현실을 회피할 수 없다면 핵추진잠수함의 확보를 넘어 강대국의 간섭으로부터 자율적으로 한국의 안보를 담보할 장기적인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색할 시간이다.
함명식 길림외국어대 지역국별연구원 및 국제상학원 교수 asymmetryir@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