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세상이 온통 총천연색이네!”
1980년 12월 1일. 한국방송공사(KBS)는 이날 오전 10시 30분부터 45분 동안 제1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을 사상 처음 컬러로 중계방송했다. 이 방송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본격적인 컬러TV 방송시대가 열렸다. 색채 혁명의 출발점이었다. 이날 KBS가 컬러TV 방송을 시작하자 전국 전자제품 대리점 앞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서 컬러 화면을 신기한 듯 지켜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세상이 변하는구나!”
컬러TV 방송은 한국이 흑백TV를 도입한 지 24년 만이고, 세계 81번째였다. 미국보다는 29년, 일본에 비해서도 20년이 늦은 지각 컬러방송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제17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참석, 치사를 통해 “제2 경제 도약을 위해 기업들은 기술개발과 품질 향상, 생산성 향상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면서 “기업은 근로자의 복지 향상과 근무환경 개선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대통령은 기념식이 끝난 뒤 리셉션장에서 수출유공자, 정부 관계자 등과 대화를 나눴다. 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컬러TV 방송에 어울리게 그동안 자주 입던 감색 계통 옷 대신 줄무늬 회색의 밝은 옷을 맞춰 입고 나왔다”고 말해 좌중에 웃음꽃이 피기도 했다.
KBS는 이날 오후 5시 20분부터 정규방송으로 '프로그램 안내'를 비롯해 '아기들 차지' '어린이 중계차 출동' '이주일의 동요' 등 어린이 프로와 '컬러의 세계'를 컬러로 방송했다. 이어 오후 9시 40분부터 태국에서 열린 한국과 태국팀의 킹스컵 준결승전을 위성 중계했다.
정부는 이에 앞서 그해 11월 10일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이 12월 1일부터 컬러TV 시험방송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이 장관은 이날 “민영방송은 아직 전국 방송을 할 정도로 중계시설과 컬러TV 방송 시설을 갖추지 못해 KBS만 평일 오전과 오후 2시간씩 컬러TV 방송을 실시한다”면서 “전면 컬러TV 방송은 1981년 4월 1일부터 실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당시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컬러TV 방송을 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과 네팔, 라오스 등 3개국뿐이었다.
정부의 컬러TV 방송 허용 발표에 대해 전자업계와 방송사 등은 단비를 만난 듯 “늦었지만 잘한 조치”라며 크게 환영했다. 컬러TV 시판과 방송은 그동안 전자업계 최대 숙원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 시절 국민 위화감 조성, 과소비 조장 등을 이유로 들고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전자업체들은 컬러TV를 만들어 놓고도 국내시장에서 판매하지 못했다. 굳게 닫혀 있던 컬러TV 시판과 방송은 1980년 들어 돌파구를 찾았다. 5공화국 출범 후 정부는 컬러TV 방송을 허용했다. 관점을 달리하자 새 길이 보인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 증언. “나는 11대 대통령에 취임한 3개월 후인 그해 12월 1일 컬러TV 방송을 허용키로 했다. KBS는 그날 수출의 날 기념식을 컬러로 내보내면서 컬러TV 방송의 문을 열었다. KBS는 시험방송을 거친 후 이날부터 모든 프로그램을 천연색으로 제작, 방송하기 시작했다. 기술집약적인 전자산업은 부가가치가 높다. 이뿐만 아니라 앞으로 컴퓨터와 통신기기 발전과 함께 정보화 사회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자산업을 육성, 발전시켜야 했다. 특히 컬러TV의 경우 흑백TV보다 부품 수가 세 배나 많고, 생산 초기 단계인 국내 반도체산업의 내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컬러TV 시판과 방송은 조속히 실시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이런 분석을 토대로 국보위 의장인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해 8월 1일부터 컬러TV 시판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컬러TV 방송은 단순히 색깔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이런저런 반대 의견과 우려에도 컬러TV 방송을 하도록 조치한 것은 우리 사회의 작동원리가 자율과 개방이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전두환 회고록)
국보위 시절 상공분과위원회는 컬러TV 시판과 방송 허용을 적극 검토했다. 그 결과를 토대로 컬러TV 시판을 허용키로 했다.
오명 박사(전 과학기술 부총리)의 회고록 증언. “나는 국보위에서 전자산업 발전방안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전자산업을 들여다보니 얽히고설킨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가전업체들은 컬러TV를 만들 능력이 충분했지만 정부는 국내 시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 때문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컬러TV를 넘어 VCR로 가고 있던 시기였다. 전자산업은 한 품목의 수요가 사그라질 때쯤 또 다른 품목이 등장해 수요를 이끌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컬러TV에서 멈춰 있었다. 이런 이유로 가전업체들은 거의 부도 일보 직전이었다.”(30년 후 코리아를 꿈꿔라)
오 박사는 컬러TV 시판 허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컬러TV 시판은 가전업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컬러TV 시장이 없으면 관련 부품 산업과 원자재 산업까지 침체, 전자산업 전반의 경쟁력이 떨어진다. 컬러TV를 수출하면서 국내 시판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그는 '가전업체들의 앞잡이'라는 비난까지 들었다. 이런 말에 휘둘릴 오 박사가 아니었다. 경영난에 처한 전자업계의 현실과 미래를 내다본 그의 소신 행보로 그해 5월 컬러TV 시판 방침을 관철할 수 있었다.
그해 6월. 상공부는 '컬러TV 산업 현황과 대책'이란 보고서를 작성했다. 상공부는 이 보고서에서 컬러TV 시판 불허로 말미암은 국내 가전업계의 문제점으로 △국내 가전시설 가동률이 24.6% 정도이며 △미국의 TV 수입 규제로 국산 TV 수출이 어렵고 △부품산업이 발전하지 못하며 △전자업체의 국제경쟁력이 악화한다 등을 제시했다. 상공부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산업 발전의 주 품목인 컬러TV의 시판을 허용하고 △부품산업 발전의 전환점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컬러TV는 1974년 아남산업이 일본 기업과 합작으로 처음 생산했다. 이어 1977년부터 금성사(현 LG전자), 삼성전자가 컬러TV 생산에 참여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80년 7월 11일. 신병현 상공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오는 8월 1일부터 컬러TV 시판을 허용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컬러TV 시판 허용을 놓고 찬성과 반대로 갈려 있던 논쟁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신 장관은 “컬러TV 시판은 전자산업 육성 측면과 대미 수출 확대를 위해 불가피한 정책 결정”이라면서 “시판 허용에 따라 내년 수출 100만대, 내수 40만대로 예상하는 가운데 전자업계 가동률을 현재 24.6%에서 내년부터 82.3%를 유지해 전자업계의 경영 개선과 고용 증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 장관은 “국내 가전업체들은 연말까지 무제한 시판할 수 있으며, 수출 증대를 위해 내년부터는 업체별로 수출 실적에 비례해서 판매하는 수출링크제를 실시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도 이날 컬러TV 방송 시기에 관한 정부 입장을 밝혔다. 이 장관은 “컬러TV 방송은 최소 1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쳐야 전국 동시 방송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컬러TV의 교육적·사회적 영향력 등을 검토, 단계적으로 방송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 방침에도 컬러TV 방송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오명 전 과학기술 부총리의 회고록 증언. “청와대 내에서도 컬러TV 방송 여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나는 김재익 경제수석의 지원을 받으며 컬러TV 방송을 강력히 주장했다. 고맙게도 당시 실세이던 허화평 비서실 보좌관도 우리 주장을 지지했다. 어려운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해 방영을 허용키로 합의할 수 있었다.”
당시 경제수석실은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 신임 아래 각종 개방정책을 과감하게 추진했다. 1980년대 청와대 산업전략은 지원 강화, 규제 완화 등 두 가지였다. 컴퓨터나 반도체 등 신규 정보기술(IT) 분야는 지원 강화, TV나 자동차 등 기존 산업은 규제 완화였다.
당시 경제수석실 행정관이던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의 회고. “이런 정책의 첫 단계 조치가 컬러TV 시판과 방송 허용이었다. 청와대 경제비서실과 과학기술비서관실은 김재익 경제수석 지휘 아래 컬러TV 시판 및 방송 허용을 추진했다. 컬러TV 시판과 방영 조치는 새 기술이 필요하거나 특별히 돈이 들어가는 일도 아니었다. 기존 규제를 풀어 준 조치였다. 작은 정책 변화였지만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전자산업과 부품산업이 발전하고 대중문화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1980년은 국내 전자업계에 복음이 울린 한 해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