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민 교수의 펀한 기술경영]<341>고객가치사슬로의 여정

하이어라키(hierarchy). 계급, 계층 또는 종종 위계로도 번역된다. 제사장 직급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히에라르키아(hierarkhia)에서 왔다고 한다. 워낙 넓은 학문에 적용되고 용도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복수의 어떤 것이 서로 위아래 또는 동등한 수준의 관계에 있을 때 이렇게 표현된다.

이것의 가장 유명한 용례라면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즐로(Abraham Maslow)의 욕구 단계일 것이다. 그의 1943년 작 '인간동기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인간 욕구는 위계를 띠는데 하나의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그다음 단계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단지 흔히 이 이론을 형상화한 피라미드 모양은 매즐로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니라고 한다.

혁신은 계층이나 위계 관계가 있을까? 피라미드 모양이나 조직도처럼 상위와 하위로 관계된 개념 묶음일까? 그러나 아무도 혁신을 이렇게 편제하려 하지는 않는다. 사소해 보이던 뭔가가 조직과 기업의 운명을 바꾸고, 비즈니스를 새롭게 정의하던 그런 누적된 경험 때문이다. 여기 그런 사례 가운데 잘 알려진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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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트래버놀 래버러토리(Travenol Laboratories)는 병원에 의료물품을 공급하고 있었다. 1931년 내과의사 도널드 백스터가 창업한 이 기업은 꾸준히 성장한다. 하지만 서로 뻔한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니 점점 경쟁이 심해졌다. 비용을 줄이고 가격을 낮추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팀을 하나 만들어서 해결책을 찾도록 했다. 상황은 놀라웠다. 이제껏 병원 적재 독에 물품을 내려놓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병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트래버놀이 한 일을 그대로 반복하기도 했다.

이 내부 프로세스에 드는 비용을 측정해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트래버놀이 각고 끝에 줄인 비용은 이 숨은 비용에 비하면 잔돈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트래버놀이 제안한 것이 요즘 흔한 공급자주도형 재고관리(vendor-managed inventory)였다.

제안은 사실 간단했다. 트래버놀은 고객 병원에 자재관리 코디네이터를 배치한다. 이들은 매일 모든 클리닉의 제품 재고 상황을 조사하고 유통센터로 주문을 보낸다. 물품이 도착하면 야간에 빈 재고를 채우고, 아침이 되면 병원은 아무 일 없이 돌아간다.

이 단순한 시스템의 성과는 놀라웠다. 병원 내부 물류비용은 두 자릿수 감소를 한다. 트래버놀의 물류 비용도 감소했다. 당연히 매출은 증가한다. 이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병원 관리자는 물론 간호사들과 전에 없이 친밀해졌다. 자연스럽게 코디네이터들이 병원 프로세스 개선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결국 트래버놀은 많은 고객 병원의 가치사슬 일부가 되었고, 얼마 뒤 경쟁사마저 인수하게 되며 정점을 찍는다.

많은 기업은 혁신을 떠올리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물론 가장 바른 선택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대개 해답을 찾지 못할 때가 많다. 그 대신 어떤 기업은 고객을 떠올린다. 그들의 문제를 찾고 해결하려는 것으로 내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과 고객을 모두 혁신해 내고야 만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소진된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생각될 때 이 한 가지를 떠올려 보라. 자기 비용을 줄이는 대신 어떻게 하면 고객의 비용을 줄일지. 그리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고객의 가치사슬에 태울지. 그것으로 당신의 많은 문제는 녹아내리고, 당신의 혁신은 태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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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민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 jpark@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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