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대착오적' 공정위 규제

기업집단 규제, 시대 변화 반영 못해
경제 형벌규정 완화 국회 논의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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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재벌 개혁'에서 '과감한 규제 혁파'를 강조하면서 정합성을 갖춘 투명한 조사에 대한 재계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 동안 재계는 물론 공정위 자체적으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봤던 형벌규정과 조사 과정에서의 비합리적인 관행이 이번에는 개선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기업 방어권 나몰라라…정당한 조사 과정 필요

재계에서는 공정위에 대해 드러내놓고 얘기하지는 못하지만 조사 과정에 대한 불만이 크다. 조사 공문에 구체적인 위반 혐의와 조사 대상 사업장이 특정되지 않는 점, 현장조사가 임의적으로 연장되는 점은 반드시 개선돼야 할 사안으로 꼽는다.

현장조사의 경우 사건 중요도를 보고 경우에 따라서는 위원장까지 결재를 받지만 이후 연장 여부는 국과장 선에서 결정할 수 있다. 재계에서는 이를 기업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지적한다.

방어권 행사가 제한되는 점도 문제다. 공정위 전원회의와 소회의는 대부분 한 번의 심의를 거쳐 제재 수위가 결정된다. 심의 전 제재 대상 기업 측의 의견을 미리 들을 수 있는 사전 의견청취 절차가 있지만 심사관이 동석해야 해 오히려 공정위 측에 피심인의 전략을 노출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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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구조 바뀌는데 기업집단 규제는 그대로

대규모기업집단에 대한 규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공정위는 현재 자산규모 5조원 이상 기업집단을 공시대상기업집단(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하며 이중 자산규모 10조원 이상에 대해서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대기업집단은 이른바 '재벌 규제'를 받는 대상이 된다.

기업집단 규제는 당초 경제력 집중 방지를 위해 도입됐다. 한국은 경제 개발 초기 정부가 소수의 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했고, 정부 지원을 받은 일부 기업집단이 독과점적 지위를 보장받아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장에 지배력을 확장했다. 경제력 집중에 더해 기업집단은 계열회사에 대한 상호출자와 순환출자로 지배구조를 왜곡하고 경영권을 세습하는 소유집중 현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기업집단 규제는 시대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국제 추세에 맞지 않고 한국에만 있는 규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대기업집단 지정제도, 내부거래규제 등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사전적 규제로 꼽힌다.

특히 대기업집단 규제 시작점인 동일인(총수) 지정도 그 의미가 퇴색됐다는 지적이다. 동일인의 명칭은 첫 번째 공정거래법 개정이 있었던 1986년 경제력 집중 및 기업집단이라는 용어를 추가하면서 도입됐다. 그러나 동일인이 3대, 4대로 내려오면서 기업집단 성격이 변화했고, 동일인의 지분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발생해 동일인을 누구로 지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졌다.

신산업의 등장으로 동일인 판단 기준이 불분명해지는 측면도 있다. 공정위가 발표하는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스타트업, 벤처기업에서 시작한 기업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과거 제조업 중심 기업들의 내부거래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동일인 지정제도를 신산업 분야에 적용하는 게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정보기술(IT) 기업이 성장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게 되면 글로벌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자료 누락했다고 전과…국회 논의가 관건

형사처벌 규정이 외국 대비 지나치게 많다는 점도 지적됐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에서는 담합 외에는 형사처벌 규정이 거의 없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경쟁법상 모든 위반 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이 규정돼 있어 불합리하다”고 강조했다. 또다른 관계자도 “미래산업 선점을 위한 경쟁 심화와 함께 공급망 이슈로 기업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며 “공정위가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해주고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는 형벌제도 등을 적극적으로 개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 위반을 형벌로 처벌하는 것은 법 취지에 맞지 않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공정거래법의 목적은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 촉진을 통한 창의적인 기업활동 조성인데 과도한 규정이 오히려 기업 활동을 제약한다는 지적이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 선진국은 경쟁법상 형벌규정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도 공정거래법 전면개정을 통해 형벌 규정을 정비하려고 시도했으나 기업결합 관련 사안 일부에서만 형벌 규정을 없애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정부는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와 법무부, 공정위 등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경제 형벌규정 개선 태스크포스(TF)'를 운영 중이다. TF는 당초 지난 10일 1차 개선과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집중호우로 수도권 피해가 커지자 회의를 미룬 바 있다. 1차 과제로는 서류 작성이나 비치 의무와 같은 경미한 위반에 대한 처벌을 줄이는 내용이 다수 포함될 전망이다. 단순 신고 의무에 벌금 또는 징역형을 부과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에 따라 비범죄화하거나 행정 제재로 전환하는 것이다. 공정위의 현장 조사를 거부할 경우 폭력 행사와 같은 불법 행위가 없다면 과태료나 과징금만 물게 할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같은 정부의 경제 형벌규정 개선 과제는 공정거래법, 상법 등 법률 개정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은 불안 요인이다. 여소야대 형국에서 법 개정이 순탄하게 이뤄질 지 미지수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국회에서 어떻게 논의가 이뤄질지, 형벌규정을 없애는 게 기업 봐주기가 아니라는 점을 공정위가 얼마나 설득할 수 있을지에 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재계 “변화는 반기지만 구체적 노력 가시화는 지켜봐야”

재계에서는 정부의 기조 변화를 반기면서도 구체적인 규제개혁 노력이 가시화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현 정부의 공정위 규제 혁신 방향에 공감하지만 결국은 신속한 집행이 중요하다”며 “서둘러 좋은 선례를 만들어 국민과 기업에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총 관계자도 “새정부의 공정위가 규제 혁신을 추진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최근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친족 범위 축소 외에는 구체적인 규제개혁 노력이 가시화되지 않아 평가가 어렵다”며 “친족 범위 축소도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향후 공정거래위원장 취임 이후 규제혁신이 보다 활발히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최다현기자 da2109@etnews.com,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