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상처 입은 국회 잔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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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정문과 본관 사이에 펼쳐진 잔디밭은 언제나 사람을 먼저 맞는다. 여름에는 파란색, 겨울에는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유사시 태권V가 나온다는 오해를 받는 국회 본관과 어우러진 넓은 잔디밭은 서울 시내에서 탁 트인 전경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국회 잔디밭 곳곳에는 '잔디를 보호합시다'라는 팻말도 심어져 있다. 그래서 누구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잔디 보호' 팻말 덕이다. 펜스나 폴리스라인을 치지 않아도 관리가 잘되는 듯했다.

그런데 특별하게 관리받던 잔디밭이 어느 순간 제 모습을 잃었다. 그것도 만물이 생성된다는 봄에.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때문이다. 대통령 취임식 후 국회 잔디밭은 곳곳에 상처가 났다. 취임식 때 설치한 시설을 철거하고 난 뒤 남은 잔디밭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제 색깔을 잃었다.

민형배 무소속 의원이 국회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국회는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13일까지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토지 사용을 승낙했다. 국회는 민 의원 측에 “훼손된 잔디가 확인되는 경우 이에 대한 복구 방법을 행정안전부와 협의할 예정”이라고 답했다. 국회는 또 “관수와 비료 주기를 통한 자연적인 복구가 진행되고 있다”면서 “복구가 되지 않은 부분은 협의해서 처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요약하면 복구를 위한 세부 계획이 없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잔디밭을 빌려서 훼손한 사람이 아니라 이를 빌려 준 사람이 복구 계획을 세워야 하는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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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 이후 국회 앞 잔디밭이 손상된 모습. 최기창 기자

4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잔디밭도 있다. 사용 날짜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단 9일. 마음속 잔디밭은 40년 동안 훼손된 채 지금도 방치되고 있다.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그러나 북한 개입설 등 왜곡은 멈추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책임자는 사과 없이 세상을 떠났다. 집을 떠난 아들이 죽어서 돌아온 걸 받아들이지도 못했는데 벌써 너무나 먼 과거가 됐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18일 '국민 통합'을 외치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위해 광주로 총출동했다. 광주시민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훼손된 잔디밭을 복구하겠다고 한다. 국민의힘 관계자에 따르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취임 이후 광주를 총 12차례 방문했다. 날짜로는 14일이다. 윤 대통령은 이번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앞두고 여당 의원들 전원에게 행사 참석을 독려했다. 이 때문에 일부 여당 의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벼락치기로 외우느라 분주했다고 한다.

국회 잔디는 조만간 파란 잎을 다시 드러낼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쓰러져 간 많은 님과 이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잔디밭도 진정성이라는 거름을 통해 언젠가 푸르름이 가득한 날이 올 수 있길 바란다.


최기창기자 mobydi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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