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공급망이 바뀌면 역사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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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세계 반도체 회사 경영자들이 공급망 때문에 밤잠을 편하게 자지 못할 것이다. 반도체 회사의 구매 담당자도 언제 어디서 공급망 문제가 터질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손톱 만한 반도체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계 100여개국, 수만개 회사에서 수천만명의 인력이 협력한다. 수천, 수만 종류의 원자재와 장비가 사용된다. 이 가운데 한두 가지 원자재나 장비·부품이 조달되지 않아도 반도체 팹이 가동을 멈출 수 있다.

◇복잡다단한 반도체 공급망

삼성전자 협력사 몇 천 곳만 잘 돌아간다고 해서 메모리 반도체 공급망이 안정되는 게 아니다. 삼성전자 협력사 수천 곳에 납품하는 세계 수십만, 수백만 개 회사에 인력·물류·원자재 문제가 없어야 한다. 코로나가 터지고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이 부족해지자 세계 자동차 공장이 생산을 중단하는 사태가 터졌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자동차 반도체 공급 문제 해결에 2, 3년 더 걸릴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자 희귀가스인 네온·크립톤·제논 수급에 비상이 걸렸고, 가격은 몇 배 내지 몇십 배 폭등했다. 이마저도 돈을 주고 구매하기가 어렵다. 10배가 넘게 뛰어올랐다.

벨기에 3M 냉매공장이 환경 규제로 문을 닫자 세계 반도체 팹에 비상이 걸렸다. ASML의 웨이퍼 클램프라는 작은 부품을 생산하던 베를린 공장에 불이 나자 첨단공정 도입에 차질이 빚어질까 우려한 삼성전자, TSMC, 인텔, 마이크론 등 대형 반도체기업에 비상이 걸렸다. 복잡다단한 반도체 공급망에서 약한 고리 하나가 끊어지면 800조원에 달하는 반도체 시장이 타격을 받는다. 이 타격은 전자, 자동차, 기계, 조선, 화학 등 모든 산업에 도미노처럼 파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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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우크라 사태 '이중고'

2018년에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와중에 코로나가 덮쳤고,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터졌다. 2021년만 해도 세계 공급망 문제가 1년 후면 끝날 것이라고 예측한 전문가가 많았다. 하지만 막상 2022년이 되었는데도 공급망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코로나로 인한 상하이 봉쇄가 길어지면 세계 경제는 우크라이나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받고 휘청거릴 것이다.

지난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기술 발전, 기후변화와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공급망이 바뀔 때마다 인류 역사도 바뀌었다. 호모사피엔스가 대선배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에렉투스를 제치고 지배적인 인간족이 된 것도 비친족과도 식량을 나누고 장거리 교역을 하며 공급망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진화인류학자들은 호모사피엔스의 '운반하고 교환하는 본능'이 10만년전 아프리카 동부와 서부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수만년 전부터 백두산과 아르메니아, 지중해 멜로스섬, 칠레 차이텐 화산의 흑요석은 수백·수천㎞ 떨어진 곳으로 팔려 나가며 신석기 시대에 칼·화살촉·도끼 등 생존 도구로 유용하게 쓰였다. 인류 역사는 집단지성을 활용하면서 세계적인 분업을 이뤘으며, 공급망이 복잡해지는 모습으로 꾸준하게 발전해 왔다. 아니 '공급망이 바뀌면 인류 역사가 바뀌었다.

8세기 신라 후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했던 장보고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연결되는 시기에 주인 없이 해적이 판치던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하면서 신으로 떠받쳐질 정도의 부와 권력을 이뤘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서 유행했던 문물이 몇 달 뒤 신라 경주에서 유행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석권하며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세계 각지와 문물을 교류하고 융합하는 장을 마련했다. 우리가 배웠던 역사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칭기즈칸과 몽골제국이야말로 르네상스, 대항해시대에 앞서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 통합 시대를 연 세계화의 선구자였다. 중국 연금술사가 개발한 화약은 몽골제국 때는 무슬림의 화염방사기를 결합한 뒤 유럽의 종 주조 기술을 응용하자 혁명적인 무기인 대포가 탄생했고, 유럽의 패권이 시작됐다.

◇자국우선주의·신냉전 기류

15세기부터 압도적인 성능의 총과 대포를 앞세운 유럽의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인류는 한층 더 개방되고 전 지구적으로 대량의 상품이 거래되고, 글로벌 공급망은 세계 구석구석을 실핏줄처럼 이어 갔다. 조선과 중국은 유럽이 이끄는 산업혁명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20세기에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한국은 광복 이후 전쟁의 참화 위에서 냉전시대 양극체제,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절묘하게 타며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 그러나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 등으로 전지구적 공급망이 쇠퇴하는 시대에 한국의 미래는 다시 불안해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세계경제를 이끌어왔던 신자유주의 체제는 금융위기 이후부터 무너지고 있다. 자국우선주의와 신냉전 조류가 밀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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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미국의 유명 컨설턴트가 미국과 우크라이나, 러시아 간 직접적인 공급망 연결이 많지 않아 미국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전쟁이 길어지자 “우크라이나 전쟁이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세계의 공급망은 고도로 복잡해졌다. 공급망의 약한 고리가 하나 끊어져도 연쇄반응이 일어나면 세계적인 충격이 올 수도 있다. 냉전시대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 중심 공급망 재편에서 미국 편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소수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과 중국의 공급망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됐는지를 모르고 현장 경험 없이 하는 소리다.

◇한국 '제조강국' 전략 과제

한국이 세계 6위 제조업 강국이라지만 미국, 중국, 인도와 같은 대국과는 스케일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원천기술도 부족하다. 인구가 30배 많은 중국과 모든 분야에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은 한 수 아래로 보던 대만의 1인당 GDP가 한국을 추월하는 게 큰 이슈가 되고 있다. 필자는 TSMC 부상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의 반도체 산업 총력 지원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본다. 얼마 전 만났던 반도체 대기업 임원은 소수의 대기업이 이끄는 한국 반도체 생태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건강하게 균형잡힌 대만 반도체 생태계를 부러워했다. 요즘 반도체 시장을 보면 국가간 패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국우선주의가 강하다. 한국 정부도 반도체 산업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중국, 미국, 대만, 싱가포르 등의 정부 지원과 비교하면 격차가 심하다.

인류사엔 언제나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이 있었다. 불, 금속, 마구, 유리, 반도체와 같은 혁신 기술은 인류 역사를 선도해 왔다. 180만년 전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는 그 당시 첨단 기술인 모닥불로 인간족이 살아남았고, 호모 사피엔스가 비친족과도 식량을 나누고, 장거리 교역을 하며 만든 공급망이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냈다. 유럽인의 막강한 총과 대포는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한반도의 조상은 고성능 활로 이 땅을 지켜 왔다. 한반도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것은 경쟁국이 쫓아오지 못할 기술 경쟁력이다. 미-중 무역전쟁, 코로나, 우크라이나 전쟁, 4차 산업혁명 등으로 공급망이 급변하는 이 시대 한국의 최종병기 '활'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한류'다. 경기도 남부지역이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반도체 클러스터이지만 반도체 기업에는 인력, 규제, 정부 지원 등 아쉬운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새 정부는 대만처럼 '반도체 생태계'에 크게 베팅했으면 좋겠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bruce@surplusglobal.com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30년간 40여개국 지구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십억달러를 사고판 무역 일꾼이다. 2000년에 기업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의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해서 이사장직을 맡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의 조직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을 받았다. 서플러스글로벌은 2018년 포브스 아시아 200대 유망 기업에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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