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리포트] 정유업계, 사상 최대 실적에도 '위기감' 증폭

러시아발 수급 불안 계속
고유가에도 수요 확대
정제마진 배럴당 20달러
석유제품 조기 퇴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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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정유업계가 역대급 정제마진에 힘입어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올렸지만 위기감은 커지고 있다. 지금과 같이 석유제품 공급 및 수요 불균형이 지속될수록 각국에서 신재생에너지로 전환이 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제품 퇴출이 빨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정유사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정유 4사, 1분기 역대급 실적

정유 및 증권업계에 따르면 5월 첫째주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은 배럴당 20.04달러까지 치솟았다. 역대 최대치다. 2020년도와 2021년 각각 같은 기간 배럴당 -1.5달러, 2.9달러와 비교하면 최대 20배 가까이 상승했다.

정제마진 상승세는 올해 들어 더욱 두드러진다. 1월 첫째주만 해도 배럴당 5.9달러였으나 3월 둘째주에는 12.1달러로 10달러대에 진입했다. 이후 3월 셋째주를 제외하고 줄곧 올랐다.

정제마진은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 등 원자재 비용을 제한 것이다. 정유사 손익분기점은 배럴당 4~5달러다. 현재 정제 마진은 네 배 이상 앞서는 셈이다.

정제마진이 가파르게 오른 것은 고유가에도 견조한 수요 때문이다. 통상 유가가 높으면 석유제품 가격이 상승하고, 수요는 줄어든다.

하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난 2월 말을 기점으로 글로벌 석유 공급량이 줄었다. 통화 결제는 막혔다. 러시아는 석유를 하루 700만배럴 수출해 왔다. 세계 공급량 대비 약 7%를 차지한다. 세계는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하는데 착수했다.

산유량 분석 컨설팅업체인 오일엑스(OilX)에 따르면 러시아 산유량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약 1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IEA는 최근 발표한 월간 보고서에서 4월 러시아 석유공급이 일일 150만배럴 줄고 5월에는 300만배럴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는 세계 1위 천연가스 수출국이기도 하다. 대러시아 제재 강화 조치로 천연가스 가격은 급등했고 국제 유가 상승을 다시 부채질했다. 여기에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하던 유럽연합(EU) 국가들을 중심으로 대체 발전연료인 경유 수요가 몰렸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정제마진은 지난해 말까지 꾸준히 뛰었다”면서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기름을 부은 것처럼 상승폭이 커졌다”고 말했다.

국내 정유 4사는 정제마진 강세에 힘입어 올해 1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웠다. 업계 1위 SK이노베이션은 석유사업부문에서만 1조5067억원에 이르는 영업이익을 냈다.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는 각각 1조3320억원, 7045억원 영업이익을 올렸고 실적 발표를 앞둔 GS칼텍스도 호실적이 기대된다. 각사 영업이익률은 10% 안팎까지 뛰어올랐다.

정유사별 일일 정제능력은 SK이노베이션 84만배럴, GS칼텍스 80만배럴, 현대오일뱅크 69만배럴, 에쓰오일 66만9000배럴순이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영업이익이 큰 폭 늘어난 것은 정제마진이 크게 상승한데다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평가이익 증가에 기인한다”면서 “지정학적 이슈로 글로벌 에너지 수급 불안이 가중되면서 '국제 유가 상승→석유제품 가격 상승→수요 둔화→정제마진 축소→실적 악영향' 공식이 깨졌다”고 설명했다.

◇“안 좋아질 일만 남았다” 우려 확대

정유업계는 사상 최대 실적에도 마냥 웃지 못하고 있다. 단기적 실적 증가는 고무적이지만 국제 유가 및 석유제품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신재생에너지와 같은 대체 에너지로 전환이 가속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석유제품 퇴출이 빨라지고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직전 배럴당 95.72달러였으나 3월 들어 103.41달러로 100달러를 넘겼고 지난 2일 기준 105.17달러로 상향 안정화됐다. 두바이유와 브렌트유 역시 2일 기준 각각 103.86달러, 107.58달러로 지난 10년 간 최고 수준에서 등락을 거듭하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러시아 석유 금수가 시행될 경우 국제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각국은 신재생에너지 강화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지난 2021년 누적 기준 14GW였던 태양광 설치량을 오는 2035년 70GW까지 확대키로 했다. 독일은 오는 2030년까지 누적 200GW 태양광 설치 목표를 215GW까지 확대했다. 2021년 누적 설치량 59GW 대비 4배에 이르는 규모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국제 유가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지정학적 이슈로 그렇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붕괴된 에너지 공급망 강화 움직임이 강해지고, 대안인 신재생에너지로 이목이 집중됐다”면서 “사상 초유 정제마진 강세까지 이어지고 있어 장기적으로 보면 석유제품 수요 감소 시점이 빨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다른 정유업계 관계자는 “석유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분포하지 않고, 무한하지도 않지 않느냐”면서 “석유 생산국이 아닌 국가들은 화석 연료 퇴출 시점을 앞당길 요인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올해 3분기까지는 정제마진 강세 전망

정유업계 위기감에도 불구하고 정제마진 강세와 정유사 실적 개선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내외 상황이 최근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유업계 내부적으로는 오는 3분기까지 실적 강세를 전망한다. 러시아 제재로 인해 석유제품 공급은 둔화하는 반면 드라이빙 시즌 진입 및 세계 경제 회복에 따른 수요 증가로 정제마진 강세가 예상됐다. 오는 3분기에 종료 예정이던 오펙 플러스(OPEC+)의 감산 완화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견조한 석유 수요를 예상, 5월 중동 원유 공식판매가격(OSP)을 배럴당 9.35달러로 1분기 대비 세 배 인상했다.

정유업계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자'는 방침이다. 업황이 좋을 때 최대한 수익을 올리겠다는 복안이다. 최근 경유 생산량 상향 조정 검토에 착수했다.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이 휘발유 생산량을 다소 줄이는 대신 경유 생산량을 높이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럽에서 몰리는 경유 수요가 꺾이지 않고 마진 강세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경유 재고는 14년 만에 최저까지 떨어졌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글로벌 석유제품 재고가 유례 없이 낮은 수준”이라면서 “특히 오는 3분기 경유 정제마진은 배럴당 25~30달러로 예상되고 휘발유(15~16달러)보다 최대 2배 가까이 높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정유사들이 경유 생산량을 높일 수 있는 비중은 전체 생산량 대비 1% 안팎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공정 문제가 있는데다, 애초 공급키로 한 휘발유 수출 물량 등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정유사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하늘길이 막혀 항공유 수요가 바닥을 쳤을 때부터 경유를 사실상 최대 캐파로 생산해 왔다”면서 “경유 생산량을 미세하게 늘릴 수는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류태웅기자 bigheroryu@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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