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국가전략기술육성법, '기정학' 시대 생존 전략

최근 국제 정세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 '미-중 갈등'이다. 미-중 갈등의 상징적 문건인 2018년 미국무역대표부(USTR) 301 리포트에는 '중국제조 2025'가 114번이나 언급된다. '중국제조 2025'는 '제조 대국'을 넘어 '제조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중국의 기술 굴기 계획이다. 미-중 갈등의 본질은 결국 기술 패권 경쟁인 셈이다. 중국은 제14차 5개년 규획(2021~2025년)에서 고급 신소재, 지능형 제조 로봇 등 8대 산업과 인공지능(AI)·양자정보 등 7대 과학기술을 지정했다. '전략산업'과 '전략기술'을 육성해서 기술 패권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미국도 과학기술 혁신을 통한 패권 수호에 나섰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G2 양국의 전면전이다.

미국과 중국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전략기술 육성을 위한 1조원 규모의 기금 창설을 결정했다. 경제 안보에 특화된 최초의 기금이다. 유럽연합(EU)도 원재료, 배터리, 수소 등 6개 전략기술을 선정했다. 지정학(geo-politics)의 국제질서가 기정학(tech-politics)의 국제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작년 의회를 통과한 패키지 법안인 미국혁신경쟁법(USICA)은 명백히 중국을 겨냥한 법안이다. 중국과 관련한 국가 안보 및 금융 서비스, 인권 문제와 관련한 수출 통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 법을 구성하는 7개 세부 법안 중 맨 앞 두 법안이 산업·기술 문제를 다룬다. 디비전A의 반도체생산촉진법(CHIPS for America Act)과 디비전B의 무한혁신법(Endless Frontier Act)은 각각 반도체 산업·공급망과 과학기술 혁신 전략을 다룬다. 전략산업 육성과 전략기술 확보가 패권 수호의 A, B라는 이야기다.

기정학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은 우리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갈수록 첨예한 대결을 벌이는 미국, 중국 모두 우리와 밀접한 국가라는 점이 위기 요인이다. 우리나라의 '기술강국' DNA는 기회 요인이다. 우리나라는 공격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해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고, 지금은 세계 5위의 R&D 대국이 됐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지혜가 필요하다. 주요국은 패권 경쟁의 핵심이라고 판단되는 기술을 전략적으로 지정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건다. 기술을 중심으로 공급망, 경제, 안보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경쟁국으로 전략기술 유출을 통제하는 한편 선도국·동맹국 간에는 전략기술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블록화' 전략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가 인텔의 중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에 제동을 거는 한편 한국과는 6G 통신, 양자컴퓨팅, 우주 등 전략기술에 대한 광범위한 협력을 약속한 것이 비근한 예다. 경쟁력 있는 전략기술을 갖추지 못한 나라는 이 판에 낄 재간이 없다. 도태되거나 배제된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입법 절차를 마친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으로 첫 단추를 뀄다. 반도체·이차전지·백신 같은 전략산업의 생산, 세제, 기술보호 지원 등을 담았다. 산업과 공급망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성숙 기술·산업을 다루는 법이다. 산업화 단계의 성숙 기술뿐만 아니라 전 기술 분야를 아우르고 신흥·미성숙 전략기술의 R&D와 인력 양성까지 지원하는, 더욱더 포괄적인 입법이 필요하다. 미국이 산업 공급망 중심의 반도체생산촉진법과 별도로 R&D 중심의 무한혁신법을 제정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발의한 법안이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국가전략기술육성법)이다.

국가전략기술육성법은 대통령이 의장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전략기술을 선정, 관리하도록 했다. 전략기술 R&D 사업은 우선 지원하고, 예비타당성 조사에 대한 특례도 부여한다. 전략기술 분야의 전문인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특화 교육기관을 지정·운영하고, 국가전략기술 특별회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국가 R&D 전략성 강화가 핵심이다. 지금도 전략기술 관리 체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난잡하다. 부처별로 9개 기술체계와 5000여개 기술이 난립한다. 이 정도의 '전략 과잉'은 '무전략'이나 마찬가지다. 미국이 무한혁신법에서 10개로 전략기술 분야를 제한한 것과 대비된다. 우리도 범정부 차원에서 전략기술을 '전략'적으로 관리·육성해야 한다.

지난해 말 정부가 과학기술관계장관회의에서 '10대 국가필수전략기술'을 선정한 것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신기술·사이버안보 비서관'이 신설된 것도 기술을 중대한 안보 현안으로 인식했다는 신호다. 이런 노력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입법을 통한 제도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국방·안보 분야 R&D의 경직성도 허물어야 한다. 인공지능, 로봇, 항공우주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은 민·군 겸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민·군의 '나 홀로 R&D'로는 경쟁력 있는 전략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국가전략기술육성법은 국방·안보 분야 R&D에서 협력 체계와 자율성을 강화하고, 'K-DARPA' 모델의 국가전략기술원을 설치·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두고 거버넌스 개편 논의가 뜨겁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국가 전략기술 육성은 개별 부처를 뛰어넘는 범정부 어젠다가 돼야 한다. 그 파급 효과가 기술과 산업을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국가전략기술육성법 제정이 첫걸음이다. 국회가 제때 입법을 완료하고, 차기 정부도 기술패권 시대의 비전을 갖추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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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yuseong0413@daum.net

○…조승래 의원은 노무현 참여정부 행정관·비서관 출신 더불어민주당 재선 국회의원이다. 초선 때부터 정책 역량과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교육위 간사를 맡았다. 지금은 과방위 간사로 활동 중이다. 민주당 원내선임 부대표와 제4정책 조정위원장을 지냈다. 과학기술·ICT·게임·문화콘텐츠 같은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다. 2020년 국회 문화콘텐츠 포럼을 만들어서 모임을 꾸려 가고 있다. 지난해 세계 최초의 구글갑질방지법 입법을 주도하며 '빅테크 저승사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최근 선대위 수석대변인, 당 전략기획위원장으로 잇달아 발탁되며 '정책통'에서 '정책+전략통'으로 진화하고 있다.

※국가전략기술법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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