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II)'의 역사적인 발사 장면을 놓칠세라 우리 한국재료연구원에서도 삼삼오오 모여 발사 중계 장면을 지켜봤다. 엔진이 점화되고 누리호가 날아오르는 순간만큼은 이를 지켜본 모두의 마음에 단 하나의 바람만 있었을 것이다. 완벽한 성공은 아닌 듯한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발사 당시의 흥분과 설렘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생생하다.
누리호 같은 우주발사체는 수천도 이상의 초고온, 수백도 이하의 극저온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필수다. 미래 국가전략산업인 우주항공·수소 등의 분야를 제대로 육성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소재 기술, 그 가운데서도 극한 소재 기술의 주권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 정부의 소재 R&D 투자비 가운데 극한 소재 비중은 10%에도 미치지 못했고, 관련 실증연구는 0.5%에 불과했다. 극한 소재 연구는 대부분 실험실 수준(랩 스케일)에 그치고 있어 실증연구를 위한 시험·평가는 대부분 해외기관에 의존해야 했다. 극한 소재는 국가 거대과학 및 핵심기술, 방위산업기술 등과의 관련성이 크기 때문에 주요 국가의 수출통제 품목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2019년 일본 수출규제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 경제보복, 패권 경쟁 등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미 극소수의 선진국 기업은 극한 소재 기술을 독점하고, 핵심 소재 기술을 내재화한 제품을 고가에 판매하고 있다. 국내 관련 산업계가 필요한 소재나 부품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직시해야 할 과제다.
극한 소재 연구와 실증 인프라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해외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은 에너지와 항공산업에 초점을 맞춰 극한 소재 연구를 추진하고, 다양한 실증연구 인프라를 함께 구축해서 운영한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0년 '극한환경소재 이니셔티브'(Harsh Environment Materials Initiative)를 발표하고 극한 소재 연구개발을 에너지 독립과 국가 보호를 위한 현안으로 설정했다. 일본도 미래사회의 중요 8대 기술 영역 가운데 하나로 '극한기능 소재'를 선정했다. 소재 분야에서 글로벌 주도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자국의 강점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인식하고 지난해 '소재 혁신력 강화전략' 실행 계획을 마련했다. 극한 소재를 정부 주도형 연구로 해결해야 할 핵심 연구과제로 확정했다.
미국, 일본 등 강대국이 정부 주도로 극한 소재 연구를 지원하고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것은 극한 소재가 띤 특성 때문이다. 극한 소재는 대표 시장 실패 분야로서 고신뢰성, 고비용, 고위험 등을 안고 기술개발을 해야 하지만 제한된 용도로 인해 의미 있는 시장을 형성하기가 어렵다. 민간기업이 대규모 리스크를 감수하며 장기간에 걸쳐 연구개발에 투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우리나라를 보면 개발 소재의 품질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평가·인증 기반이 상당히 부족하다. 극한 소재를 개발해도 물성·성능 평가를 해외기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물성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일본의 한 기업은 일본 내 기업과 기관은 물론 우리나라 대기업과 공기업, 심지어 출연연을 비롯한 전문 연구기관까지 거래처로 삼고 있다.
70년이 넘는 해당 일본 기업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당장 따라가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대비하지 않으면 미래 시장을 좌우할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는 국가 거대과학 및 시스템 기술과 관련해 출연연의 극한 소재 활용 수요가 많다. 극한 소재의 공공성, 국가안보와 직결성 등을 고려해서 하루빨리 극한 소재 실증연구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늦었지만 항공우주, 국방, 에너지 등 국가안보와 직결된 첨단 극한 소재 분야 협력 연구 기반을 마련하자. 기관별 역점 분야와 강점을 결집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뒤처진 극한 소재 분야 연구를 효율적으로 수행해서 따라갈 수 있다. 극한 소재 연구와 실증은 전통 주력산업을 다시 일으키고, 산업 생태계 전환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이다.
한국재료연구원이 실시한 '극한 소재 관련 산·학·연 전문가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0% 이상이 '극한 소재 실증 인프라가 부족하다'고 답했고, '인프라 구축과 집적화가 필요하다'는 답변도 97% 이상으로 집계됐다. 국내 실증연구 인프라 확충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해외 시험기관에 평가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던 극한 소재 실증연구의 애로를 해소할 수 있다. 중소기업의 경우 극한 소재 개발과 실증을 위해 연구기관의 역량과 기반을 활용하고자 하는 수요가 많다. 극한 소재 실증 인프라 구축과 집적화, 나아가 산·학·연 상생협력 플랫폼을 구축하면 기업의 극한 소재 개발과 양산화를 지원해 새로운 연구개발 성과 창출은 물론 기술 자립까지 가능하다.
세계적 첨단 소재 기업 일본 도레이의 닛카쿠 아키히로 사장은 우리나라 일간지와의 신년 인터뷰에서 “한국이 소재 강국이 되려면 최소 10년 동안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도레이의 경쟁력은 10년, 20년 후를 생각하는 '장기경영'이라며 “한국이 소재산업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기적 관점'의 시각과 경영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항공기 엔진구조재, 가스터빈 블레이드 등 여러 고부가가치 분야에서 소재 사용 환경은 점점 극한화(極限化)되고 있다. '장기적 관점'으로 접근하면 극한 소재의 기술 자립이 필수라는 결론에 이른다.
일본의 과거 수출규제 전략물자를 비롯한 화이트리스트 가운데 상당수는 극한 소재였음을 기억하자. 우리나라의 극한 소재 기술 수준은 선진국을 따라가지만 실용화를 위한 신뢰성과 실증평가 핵심 인프라 및 평가기법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직시해야 한다. 2월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코로나19 오미크론 대확산으로 지쳐 있는 국민의 '집콕생활'에 잠시나마 즐거움을 선사했다. 대회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스웨덴의 닐스 판데르풀은 한때 부진한 성적으로 빙상계를 떠났다. 특수부대 훈련을 비롯해 극한에 도전하는 운동 종목을 두루 섭렵하며 기초 체력을 기르고 재기에 성공했다는 그의 인터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통적인 트레이닝에 안주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극한에 도전한 결과다.
우리나라 과학기술도 이제 극한(極限)에 도전할 시기가 됐다. 개방·협력·공유가 가능한 극한 소재 실증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극한환경을 견딜 수 있는 소재 기술 개발과 실증을 지원하면 우리나라는 글로벌 극한 소재 경쟁 환경을 극복한 소재 강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이정환 한국재료연구원장 ljh1239@kims.re.kr
이정환 원장은 1982년 재료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시작으로 융합공정연구부장, 산업기술지원본부장, 선임연구본부장, 부소장, 소장을 지냈다. 한국기계연구원 부설 재료연구소에서 독립한 한국재료연구원으로의 원 승격을 주도했고, 2020년 한국재료연구원 출범과 함께 초대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재부품장비 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한국소성가공학회장, 한국엔지니어연합회 창원회장, 한국산업기술인회장, 경남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며 지역산업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