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등학생들의 장래 희망이 '건물주'라는 조사 결과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대답에 담긴 아이들이 생각하는 미래는 도전과 희망이 없는 미래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나의 어린 시절 장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를 떠올려본다. 때때로 꿈이 조금씩 바뀌기도 했지만 청소년기에 냉전 시대를 거쳐 미국과 옛 소련의 과학기술 개발 경쟁을 목도하며 부국강병을 구현하는 과학기술자의 꿈을 키웠다. 어떤 의미에선 그 꿈을 이뤘다.
2019년 국회미래연구원이 발간한 '한국인 선호미래 조사 연구'라는 보고서를 보고 어린 시절 나의 꿈속에는 선호하는 미래를 맞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미래학에서 말하는 선호미래란 가능성은 낮더라도 개인과 사회가 노력을 통해 이뤄 나가고 싶은 변화의 방향, 즉 목적지에 해당한다. 어린 시절 나의 꿈은 미래에 내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되었고, 나는 목적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상황에 맞게 결정해 나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 작은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간 덕분에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긴 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필자가 꿈을 이루게 된 성공담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사회가, 국가가 선호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싶다. 20세기 말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라는 선호미래가 명확했던 덕분이다. 가난한 저개발국에 사는 우리에게 서구열강의 모습은 부러운, 선호하는 미래였다. 국가 차원의 분명한 선호미래는 필자가 몸담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서 기술개발을 통한 산업발전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고, 우리는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목표로 나아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 됐다.
안타깝게도 세계가 인정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 우리 선호미래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한동안 반복되고 있는 출연연 역할과 책임(R&R)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선호미래를 모르니 선호미래로 가기 위한 출연연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된다. 그동안 과학기술 출연연은 기술 중심 사고를 바탕으로 당시 기준으로 경제발전에 필요한 가능한 기술 수준을 목표로 설정하고 최선을 다해 목표를 달성시켰다. 연구개발(R&D) 미래 방향 설정 방식이 경제성장을 위한 추격 시대에는 잘 작동해 왔다.
그러나 기술 변화와 더불어 사회 변화를 고려하지 못한 탓에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에 과학기술이 앞장서 주기를 바라는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과학기술 출연연의 꿈이 경제개발 목표라는 한계에 갇힌 셈이다. 이제는 성공이 담보된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가능성이 낮더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올바른 가치를 담아 살고 싶은 세상을 그려야 한다. 그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과학기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현재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해지고, 과정을 충실하게 즐긴다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과학기술자가 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과학기술자가 되었을 때의 멋진 모습에 대한 열망만이 가득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방향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선호미래였던 셈이다. 대한민국은 갈림길 앞에 있다. 한 길은 현 상황을 그럭저럭 유지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한 단계 더 성숙해져서 그동안 참조로 했던 선진국에 진짜 진입하든지.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그동안 몸집을 키우면서 살아왔던 청소년 시절을 끝내고 내 삶을 책임지면서 이웃을 배려하는 진정한 성인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왔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내미는 발자국이 첫 발자국이 된 상황이다.
어른이 되면 부모나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숙지하고 따르기를 끝내고 내가 살아가는 가치를 먼저 설정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회가 다른 선진국과 다른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설정하고 실현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홍익인간, 즉 인간을 두루 행복하고 이롭게 하는 배려정신을 꼽을 수 있다. 아프리카 부족어인 우분투(Ubuntu)도 같은 맥락이다. 가치의 방향이 정해지면 선호미래를 그릴 수 있다.
개인이 선호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나 사회 또는 국가가 선호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 차이가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을 피터 드러커가 먼저 했는지 앨런 케이가 먼저 했는지 중요하지 않다. 창조하고 싶은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가 그려지지 않는데 무엇을 창조한단 말인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사회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성, 바로 창조하고 싶은 미래를 그려 보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 또는 국가의 대다수 구성원이 합의하는 미래를 그려 보자.
김명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joonkim@etri.re.kr
<필자소개> 김명준 원장은 자타 공인 우리나라 최고의 소프트웨어(SW) 전문가로 꼽힌다. 프랑스 유학 중 대한민국의 최초 컴퓨터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타이컴(TiCom) 탄생에 일조했다. 우리나라 첫 데이터베이스관리시스템(DBMS)인 바다 시스템, 리눅스 표준플랫폼 부요(Booyo), 글로리(Glory)사업을 통해 우리 SW산업을 한층 발전시켰다는 평가다. 2013년 미국 리눅스재단 이사에 선출됐고, 이후 개발기술 상용화를 위한 연구소기업 창업, SW정책연구소장직을 거쳐 ETRI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ETRI를 국가지능화종합연구기관으로 천명하고 인공지능(AI) 실행전략, AI 아카데미, 중장기 기술발전지도 2035, 전주기 통합사업관리체계 등을 완성시켰다. 현재도 국제화를 강조, ETRI의 국제적 연구기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