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시아의 시대는 케이팝처럼 온다'의 저자 정호재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K-팝'과 '반도체'가 뭔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2년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 산업은 K-팝과 반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대통령이 G7 회의에 초대받아 대접을 받기도 했다. 필자가 해외 반도체 전시회에 나갈 때 K-팝에 폭 빠진 해외 고객의 딸 이야기를 듣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됐다. 두어 달 전에 코로나가 잠깐 주춤할 때 터키 관광을 다니면서 재미난 일화도 겪었다. 터키 소녀들이 잘생긴 한국인 가이드에게 사인을 받으러 몰려왔다. BTS, 블랙핑크, 기생충, 오징어게임, 지옥 등 한류 히트작이 끊이지 않는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BTS, 오징어게임 덕분에 어깨가 으쓱해진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미국, 일본, 유럽 사람들로부터 자존심 상하는 일들도 자주 겪었다. 이젠 세계 어디를 가도 코리안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반도체 업계에서 한국 위상도 대단하다. 국가별 반도체 투자금액에서 대만, 중국과 선두를 경합하고 있지만 본사 소재지 기준으로는 한국이 단연코 세계 1위 반도체 투자국이다. 해외에서 반도체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의 달라진 위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런데 반도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K-팝 열풍을 보면 한국 메모리 반도체 산업과 묘하게 닮은 점들이 보인다.
첫째, K-팝과 반도체는 전 지구적 교류의 산물이다. 손톱보다 작은 D램 메모리 반도체를 하나 만들려면 서너달 수백 종류의 장비와 수백 종류의 화학물질을 쓴다. 까고, 찍고, 갈고, 다듬고, 씻는 수백 가지 과정을 거친다. 수십만개 회사가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소재 등 수백만 개의 특화된 기술로 세계적 공급망을 만들어 협력해야 최첨단 반도체가 완성된다. 물리·화학·수학·전기전자·재료 등 인류가 축적한 온갖 과학기술이 손톱보다 작은 반도체 하나에 쌓여 있는 것이다.
재료를 공부하고 반도체 장비 판매업을 하는 필자의 눈에는 인류가 모닥불과 주먹도끼부터 시작해서 유리, 도자기, 야금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최첨단 반도체 기술까지 개발해 온 수천, 수만 년의 대장정이 보인다. 600도의 모닥불로 토기를 굽던 신석기시대 사람들, 기원전 2000년경 히타이트의 대장장이들, 중국 상나라 시대의 도자기공들, 로마제국의 유리기술자들, 낙타 등에 최신 문물과 사상, 과학기술을 실어 나른 소그드 상인들, 중국·중동·이집트·유럽의 연금술사들, 르네상스의 지적 기반을 만든 이슬람 사원의 학자들, 유라시아의 과학기술을 통합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서구의 장인들, 과학자와 엔지니어들…. 인류가 도구를 쓰고 시작하면서 수만년간 유라시아 무역으로 촉발된 집단지성으로 발전한 소재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로 진화하며 산업혁명에서 현대 첨단 문명까지 발전하게 이끈 혁신 동력이 됐다. 3나노, 2나노, 1나노 같은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일에 불과한 미세 선폭의 최첨단 반도체 기술도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유라시아 구석구석에서 수만 년간 개발된 기술과 상품을 장사꾼들이 퍼 나르면서 융합되고 발전한 것이다.
K-팝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K-팝 또한 전 지구적 교류의 산물이다. 조용필, 들국화, 소방차, 서태지와 아이들과 같은 1980, 1990년대 가수들, 가깝게는 일본 대중문화로부터 틀을 가져왔고, 1970, 1980년대 미국의 팝 뮤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K-팝은 미국팝과 J-팝을 따라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더 길게 본다면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민족의 수천년 문화적 DNA에서 시작됐다. 역사기록에 한민족이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그것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면서 주야무휴(晝夜無休)로 놀았다고 한다. 고구려나 부여에서는 길을 가면서도 노래를 하고 일이 끝나면 저녁에 모여 노래를 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처용가를 부르며 귀신을 쫓았고, 왜적을 물리칠 때에도 향가를 지어 불렀다. 그런데 8세기 신라 음악은 서역인(소그드인, 쿠차인 등)의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 신라 시대에는 고유 음악을 향악(鄕樂), 서역에서 유래한 음악은 속악(俗樂), 중국 당나라의 음악은 당악(唐樂)이라고 불렀다. 현재 한국의 국악은 그 본질적 요소는 속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 중의 하나인 부채춤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K-팝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신장 위구르, 중앙아시아, 더 나아가 페르시아,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둘째, K-팝과 메모리 반도체 둘 다 개인기보다는 집단적 협력의 산물이다. 한국축구가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잘나가는 것은 집단적 협력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K-팝 대표주자들을 보면 솔로보다는 보이그룹, 걸그룹이 많다. 싸이, 리사와 같은 솔로도 있지만 BTS, 블랙핑크, 트와이스, ITZY, 에스파,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등 개개인의 독특한 매력과 개성을 살리면서도 집단 군무와 노래로 조화를 이룬 그룹이 세계 음악시장을 주도했다.
필자도 대학시절 학교 뒤편 청송대라는 숲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새벽까지 친구들과 떼창을 부르곤 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어울려 춤추길 좋아하는 한민족의 문화적 유전자는 20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하나를 생산하기 위해서도 서너달 동안 수백개의 복잡한 공정 과정에서 수천 수만명의 집단적 협력이 필요하다. 중국이 메모리 반도체를 키우려고 수많은 한국 엔지니어를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집단적 협력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천재 엔지니어 몇 명이면 성과를 낼 수 있는 팹리스 산업에서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셋째, K-팝과 반도체 모두 수십년간 축적과 발산의 과정을 거쳐 생산 시스템의 혁신을 이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주력산업을 보면 철강, 화학, 조선, 전자와 같이 소품종 대량생산 산업이 많다. 10여년 전 철강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해 준 이야기가 기억난다. 중국회사가 수백억원짜리 철강 라인을 일본에서 사면서 장비 설치는 한국 사람에게 맡길 수 있는지 문의했다고 한다. 일본인이 철강라인을 잘 만들지만, 그 라인을 효율화시켜 대량생산을 하는 것은 한국인이 탁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사람들이 반도체 수율을 올리기 위해 피나는 혁신의 노력을 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내 자식은 반도체 시키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술자리에서 1980년대, 1990년대 반도체 회사 선배들의 살인적인 업무 강도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이 들었다. 그들의 반도체 생산 시스템 혁신이 세계 최고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일구어 냈다. 한국 반도체 회사들이 메모리같이 소품종 대량생산을 하는 반도체는 잘 만들지만 비메모리나 파운드리에서 아직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한국인의 국민성이 대량생산에 더 잘 맞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K-팝 육성시스템을 보면 연습생은 3~5년 연습생 시기를 보내면서 노래, 춤, 외국어, 교양 등을 공부한다. 보통 아이들이 5살에서 12살까지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중학생이 되면 음악학원에서 교육을 받고 오디션에 참가하게 된다. 이렇게 체계적인 아이돌 육성시스템을 가진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경기도 남부에 수 만개의 회사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생태계를 지탱해 주듯이 K-팝도 세계 최고의 아이돌 양성 시스템이 뒷받침된 것이다. 한국의 개방적이고 혁신적이면서도 민주적인 사회 토양도 K-팝 생태계의 든든한 인프라가 되었다.
이제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많은 해외 국가들이 한국이 무엇을 보여 줄지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서 어떤 드라마가 나올지, 어떤 노래가 나올지,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올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서울은 런던, 파리, 뉴욕과 비슷한 위상으로 세계인에게 인식되고 있다. 미국 영화와 미드에 나오는 한국은 쿨한 첨단 기술의 나라가 되었다. 추격자의 위치에서 선진국을 쫓아만 가던 한국이 K-팝과 반도체로 세계를 리드하고 있다는 사실이 1인당 GDP 100달러일 때 태어난 필자에겐 어색하기까지 하다. 이제는 서구 사람들한테 느꼈던 열등감과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한국이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가치와 문명을 제시하는 시대가 되었으면 좋겠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 bruce@surplusglobal.com
◇김정웅 대표는…
연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30년간 40여개국 지구촌 구석구석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2000년 기업 간 전자상거래회사인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반도체 중고장비 분야 세계 1위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2년 발달장애인의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해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19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개최된 자폐전문 박람회 'Austism Expo' 조직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2015년 6월 '이달의 무역인상' 수상, 10월 무역의 날 대통령상 수상했다. 서플러스글로벌은 2018년 포브스 아시아 200대 유망 기업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