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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월 16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방문한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왼쪽에서 네 번째)가 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잔치는 끝났다. 이제 도약을 위한 날갯짓을 시작하자.”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1969년 10월 23일 준공식을 가진 후 파격적인 혁신 행보를 시작했다. 연구소는 기존에 생각조차 하지 못한 연구실 독립채산제와 계약연구제 등을 도입했다. 정부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추진하는 미래 산업설계에도 참여, 나침반 역할을 했다. 이런 행보는 연구소 혁신의 신호탄이자 과학기술 도약을 위한 힘찬 날갯짓이었다. 기존 과학기술 토양을 일시에 뒤집는 일이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국내 최고 선망의 직장이었다. 월급이 대통령보다 많고, 연구원에게는 냉방과 난방 시설을 갖춘 주택도 제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구 자율성과 독립성을 법률로 보장했다. 회계감사도 받지 않고, 사업계획 승인도 받지 않았다. 이런 사례는 국내에 전무했다. 최형섭 연구소장(전 과학기술처 장관)은 늘 연구원에게 “훌륭한 연구는 돈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겠다는 성실한 마음가짐에서 시작한다”면서 “시계를 보지 말고 일에 몰두하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최형섭 소장의 평소 지론이었다.

연구실 독립채산제를 도입한 최형섭 소장의 회고록 증언. “단위 연구실제를 채택해 연구실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엄격한 연구원가 제도 아래 연구실 단위 독립채산제를 적용했다. 연구에 필요한 인건비나 재료비를 부담하는 것은 물론이고 실험실 기기 등에 대한 사용료도 부담하도록 했다.(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연구소에 더이상 공짜 점심은 없었다. 연구실 독립채산제는 시일이 지나면서 차츰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 연구원이 실험실 공간을 넓게 사용하려고 서로 경쟁했다. 그러나 늘어난 공간 비용을 자신이 부담하는 걸 알고 비용 절감에 앞장섰다. 연구기기 구입을 최소화했다. 그 대신 부품을 사들여 연구소 내 공작실에서 기기를 제작해 사용했다. 연구소는 미국이 제공한 연구비 가운데 절감한 돈을 반납했다.

최형섭 소장의 이어진 회고. “연구소 예산을 절약해 사용하다 보니 미국에서 제공한 연구기기 예산 1000만달러 중 135만달러가 남았다. 나는 이 돈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 돌려주기로 했다. 연락을 받은 개발처장이 깜짝 놀라 달려왔다. 연구소 설립은 한·미 양국 대통령이 합의한 특별과제인 만큼 이유가 궁금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1차로 필요한 것은 다 구입했고 앞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벌어서 사면되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돈이 남았다고 쓸데없는 기기를 구입하면 오히려 연구 분위기만 흐려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것이 바로 연구소 설립 정신의 하나였다.”

최형섭 소장은 내부 운영에도 파격 조치를 했다. 연구실 책임자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하고, 인사권을 비롯해 예산집행권 등 권한을 넘겼다. 연구소 연구실 S씨의 말. “윗사람이 가진 권한을 아래로 넘긴다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최 소장은 인사권과 예산집행권 등을 연구실 책임자에게 넘겼습니다. 평일에 야유회를 가도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최형섭 소장은 연구진과 행정직 간 업무 한계를 명확하게 정해 내부 갈등의 여지를 없앴다. 최형섭 소장은 “행정은 연구를 위한 지원이라는 원칙에서 행정직원은 연구원 요청이나 처사에 대해 비방하거나 규제하지 말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연구원과 언쟁을 해서는 안 된다”면서 “만약 연구원 요청이 불합리하거나 규칙에 어긋하면 소장이나 연구 담당 부소장에게 보고해 해결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최형섭 소장의 이어진 회고록 회고. “연구소 운영 방침은 보는 시각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내부 갈등이 발생한다. 연구소 행정직원들은 이를 완벽하게 실천해 과학기술 개발과제 수행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행정담당 부소장인 신응균 장군의 공이 컸다. 연구소에 통제가 아닌 지원을 기본으로 하는 연구소 행정이 뿌리를 내리게 했다.”

계약연구는 연구소가 초기부터 내건 기치였다. 이 연구는 기업들의 기술 해결사이자 국가 산업 발전의 안내도 역할을 했다. 연구소 출범 후 처음 계약연구 업무를 담당한 사람은 서울시 수도국장이던 최종완 박사였다. 연구소 연구개발실장직을 맡아 안내 슬라이드와 책자를 만들어 계약 과제를 수주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연구소가 외부에서 위탁받은 첫 연구과제는 신진자동차의 윤활유 문제 해결이었다. 연구는 한상준 박사가 맡아 해결했다. 이후 채영복 박사를 주축으로 정밀화학연구팀은 한독약품과 공동으로 폐결핵 치료제인 에탐부톨 기술을 개발, 기업에 이전했다. 기술 이전으로 수입 제품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소비자 가격도 절반으로 줄었다.

이 사례가 입소문이 나자 산업계 등에서 앞다퉈 각종 기술 개발 연구과제를 연구소에 맡겼다. 1971년 8월 말 당시 총 연구계약 건수는 450건에 달했다. 산업계 과제가 214건으로 가장 많았다. 출연금 과제 121건, 정부 과제 99건, 기타 16건 순이었다. 분야별로는 전자 76건, 화학과 화공 66건, 재료와 금속 60건, 기계 49건, 식품 37건, 기타 162건 등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계약 금액이 2000만달러에 달해 정부 지원 없이 운영할 수 있었다.

연구소는 사설 전자식 교환기 개발도 선도했다. 연구소는 전자장치연구실장이던 정만영 박사가 총괄하고 안병성 박사가 개발 책임을 맡아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미국 통신사 GTE로부터 개발비를 지원받아 전자식 교환기 실용화에 성공했다. 연구소는 이 기술을 삼성전자에 이전했고, 기술 개발에 핵심 역할을 한 이주형 박사와 전유식 박사 등 5명을 삼성전자로 보냈다. 이 기술은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로 이어졌고, 우리나라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게 했다.

포항제철(현 포스코) 건설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경제기획원은 1969년 6월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건설전담반을 구성했다. 연구소는 기술계획서 작성과 경제성 검토를 맡았다. 책임자는 김재관 박사였다. 김재관 박사는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독일 유학생 대표로 국내 처음 '한국 철강산업 계획안'을 전달한 바 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공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재관 박사는 해외 과학자 유치 1세대다.

김재관 박사의 생전 회고. “박 대통령이 계획안을 들고 무척 좋아하시면서 '고맙다. 꼭 고려해 보겠다'고 말씀하셨다.” 김재관 박사는 해외 과학자 유치에 따라 귀국해 연구소 금속가공 제1연구실장으로 일했다. 김재관 박사는 이후 상공부 초대 중공업차관보, 한국표준연구소장, 인천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지냈다. 1969년 9월 정부 계획안 50만톤 미만을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103만톤 규모의 계획안을 수립했고, 이를 통해 한국 산업 발전의 토대인 종합제철소 설립을 기획했다. 포항제철의 1기 설비 규모가 103만톤이 된 배경이다.

당시 설계 도면도 김재관 박사가 작성했다. 김재관 박사는 이경서 박사, 남준우 박사와 자동차 산업을 포함한 기계공업 육성방안도 마련했다. 김재관 박사는 연구소 조선해양 연구실장인 김훈철 박사 등과 함께 '장기 조선 공업 진흥계획'도 수립했다. 현대조선을 시작한 정주영 당시 회장은 생전에 “기술연구소에서 한 수 배웠어”라고 말했다.

김훈철 박사의 증언. “당시 자동차도 못 만드는 나라에서 김재관 차관보가 고유의 국산 차를 생산해야 한다고 하도 강조하니까 정세영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이 정부에 자동차에 미친 관료가 있는데 그게 김 차관보다. 그러면서 김 차관보를 자동차 박사라고 불렀다고 해요.”

포항제철의 경제성 분석을 위해 윤여경 연구소 경제분석실장도 이 사업에 참여했다. 103만톤 규모의 제철소 건설계획안은 1969년 11월 말 한국에 온 세계은행조사단으로부터 경제적, 기술적 타당성을 인정받고 그해 12월 초 한국과 일본은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에 관한 기본협정을 체결했다. 그때 일본 제철 설비제조업 간 담합 움직임을 포착한 김철우 박사와 이봉진 박사가 그들에 대한 철저한 사전예비 조사를 실시, 담합을 원천 봉쇄한 일도 있었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은 싸게 최신식 설비를 구입,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윤여경 박사의 회고. “당시 일본인들과도 만났다. 우리가 제철에 관해 잘 모르니까 장비 선정 때도 일본 기술자들이 하자고 하는 대로 했다. 이때 김재관 박사가 문제점을 꼼꼼하게 지적해 우리 주장대로 공장을 설립할 수 있었다.” 당시 종합제철소 건설과 운영에 경험 있는 한국인은 없었다. 유경험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연구소는 신일본제철의 기술자 정년이 55세라는 사실을 알고 이들을 포항제철 사원으로 직접 고용하려고 접촉했지만 “후배들과 경쟁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연구소는 다른 묘책을 찾았다. 연구소는 원료처리와 열관리 등 11개 분야 일본 기술자들을 연구소 위촉 책임연구원으로 채용했다. 연구소는 이들을 포항제철로 파견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미래전략연구센터(센터장 김원준 교수)는 2019년 1월 제철산업과 중화학공업, 자동차 공업 등과 관련해 김재관 박사 등 당시 주역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KIST,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이란 책자를 펴냈다. 연구소는 정부의 미래 산업전략과 계획 작성에도 참여했다. 과학기술진흥 장기 전망을 비롯해 장기에너지 수급계획, 중공업 육성방안, 기계공업 근대화 방안 등 정부의 장·단기 과학기술과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 수립 및 계획 작성에 두뇌 역할을 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은 연구소에서 열정을 다해 과학기술 강국과 산업발전의 초석을 놓은 주역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