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8>박 대통령, 연구소 설립자로 법인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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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4일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왼쪽 두 번째)과 버스틴 유솜 처장(왼쪽 세 번째)이 한미 두 나라를 대표해 연구소 설립 협정서에 서명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한·미 두 나라가 1966년 1월 바텔조사단 보고서를 수락하자 경제기획원은 연구소 설립자와 초대 소장 인선에 착수했다. 이 일은 당시 과학기술계 최대 관심사였다.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연구소 설립자를 놓고 두 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하나는 국내 재벌급 기업인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뒤 연구소 건설과 운영비를 정부 예산으로 출연하는 안이었다. 이 경우 기부금을 낸 민간인 가운데에서 설립자를 선출하고, 재단 이사회도 순수 민간인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모든 건설비와 운영비를 제공하면서도 재단 설립이나 운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개인 자격으로 연구소 재단 설립자로 가는 안이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이런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경제기획원 전상근 기술관리국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전상근 당시 국장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이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 발전사를 연구한 미국의 스티븐 데디예르(Steven Dedijer) 박사가 발표한 '저개발 국가의 저개발 과학'이라는 논문을 읽고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데디예르 박사는 이 논문에서 '후진국일수록 과학기술을 대변하거나 압력 단체 역할을 할 집단이 존재하기 어려우며 … 이런 풍토에서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개발하고 촉진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그 나라 대통령이나 총리가 직접 앞장서서 과학기술 개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의 과학기술개발)

전상근 기술관리국장은 곧바로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전 경제부총리)실로 올라가 자신의 구상을 보고했다. “우리 실정에서 과학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려면 대통령이 몸소 과학기술에 관심이 크다는 것을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기술연구소 재단 설립자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전상근 국장의 말을 다 듣고 난 김학렬 차관은 찬성했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김학렬 차관은 흡족해 하며 이 일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행정 절차까지 알려줬다. 자신을 얻은 전상근 국장은 이를 청와대 경제비서관실에 제안했다. 며칠 후 한준석 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전 해운항만청장)이 대통령 뜻을 전해 왔다. “대통령께서는 개인 자격으로 연구소 설립자가 되는 것을 기꺼이 승낙하셨습니다. 동시에 사재에서 100만원을 연구소 재단법인 설립비로 기부하시겠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연구소 설립자로 나서고 사비 100만원까지 기부하자 연구소 설립 작업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1966년 2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은 개인 자격으로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법인설립 신청서를 주무 부처인 경제기획원에 제출했다. 신청서 내용은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위하여 본 정관을 작성하고 1966년 2월 2일 아래 명의의 설립자가 이에 서명 날인함. 서울특별시 종로구 1번지 박정희'였다. 법인설립 신청서를 접수한 경제기획원은 바로 당일 장기영 장관 명의로 재단법인 설립 허가장을 발급했다. 허가번호 제13호로 발급한 법인설립 허가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자 서울특별시 세종로 1번지 박정희. 1966년 2월 2일자로 신청하신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을 허가합니다. 경제기획원장관 장기영'

큰 산을 하나 넘은 경제기획원은 이어 초대 연구소 소장 인선에 나섰다. 과학기술계 인사들은 서로 만나면 “누가 소장으로 가장 유력합니까?”라며 초대 소장 인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경제기획원은 소장 인선 기준을 정해 적임자를 물색했다. 미국 측은 소장 자격으로 경영 능력이 뛰어난 행정가를 선호했다. 한국 측은 해외 과학기술자를 유치하려면 행정가보다는 박사 학위가 있는 저명한 과학자가 더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상근 국장은 미국 과학사절단이 1965년 7월 8일부터 7일 일정으로 한국에 왔을 때 그들에게 한국인 과학자를 최대한 많이 만나도록 일정을 짰다. 그런 만남을 통해 초대 소장 선임에 미국 측 평판을 참고할 계획이었다. 도널드 호닉 박사는 같은 달 15일 경제기획원에서 열린 2차 한미공동회의에서 방한 소감을 밝혔다. “여러 연구소와 기업 현장을 방문하면서 한국 과학자의 능력과 노력이 뛰어난 점은 고무적이었습니다. 특히 금속연료연구소의 연구 활동은 인상적이었고, 연구소를 설립한 최형섭 박사(전 과학기술처 장관)는 대단히 유능하고 지도력도 있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호닉 박사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최형섭 박사에 대해 좋게 말했고, 귀국 후 린든 존슨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최형섭 박사에 대해 호평했다.

1966년 1월 말 경제기획원 3층 기술관리국장실에서 과장회의를 하던 중 국장실 전화벨이 울렸다. “전 국장님, 장관 비서실장입니다. 장관께서 연구소 설립 관계로 지시 사항이 있답니다. 곧 장관실로 오십시오.” 전상근 국장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나를 호출하셨나”하며 장기영 장관실로 들어섰다. “연구소 설립은 잘 진행되고 있지?” “예.”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화했어요. 연구소장 인사를 빨리 매듭지으라는 거야. 누가 적임자일까. 물론 미국 측 의견도 들어야 하겠지만….”

전상근 국장은 그동안 인선 과정을 장기영 장관에게 설명하고 최형섭 박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최 박사는 한국 과학자 가운데에서 지도력이 가장 뛰어난 과학자라는 게 제 소견입니다. 미국 대통령 특사로 내한한 호닉 박사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호닉 보고서에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최 박사라면 미국 측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으로 봅니다.” “좋아요. 그만한 과학자면 미국 측 의견을 듣고 청와대에 소장 후보자로 상신합시다. 그런데 단일 후보보다는 복수로 추진하는 게 좋을 듯하니 그 점은 전 국장이 알아서 정리하세요.”

장관실을 나온 전상근 국장은 버스틴 유솜(USOM) 처장 등 미국 측 인사의 의사를 타진했다. 그 결과 미국 측은 최형섭 박사를 초대 소장으로 선임한다면 그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상근 국장은 장기영 장관 지시에 따라 복수 후보자를 청와대에 추천했다. 당시 추천한 소장 후보는 최형섭 박사와 최상업 서강대 부총장,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기계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석구 박사였다. 모두 과학기술계에서 존경받는 훌륭한 과학자였다.

청와대도 기술연구소 초대 소장 인선 작업을 했다. 한동준 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은 국내 과학자 가운데 최형섭 박사를 우선순위에 올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형섭 박사가 회고록(불이 꺼지지 않은 연구소)에서 밝힌 내용. “나는 1964년 대한화학회가 발간하는 '화학과 공업의 진보'라는 잡지에 'NRC(National Research Council, 국가연구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캐나다의 과학기술 진흥'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실었다. 그해 말 한준석 청와대 경제담당 비서관이 나를 찾아와 '당신이 쓴 글을 대통령께서 읽으셨소. 청와대에서 글 내용을 설명해 주시지요'라고 말했다.”

최형섭 박사는 그 후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국무총리, 각 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연을 했다. 당시 청와대는 유명 인사를 불러 그들의 강의를 듣곤 했다.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갑자기 질문을 했다. “최 박사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최형섭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평소 생각했던 과학기술 발전 방안을 말했다.

“우선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무엇보다 과학교육을 바꿔야 합니다. 과학을 아는 교육에서 과학을 하는 교육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지금 교육대로라면 정답과 오답을 가리는 일은 잘해도 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운용하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그러자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이 “아는 교육과 하는 교육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최형섭 박사는 실례(實例)를 들어 차이점을 설명하고, 내친김에 평소 생각하던 자신의 교육관도 피력했다. “양적 교육보다 질적 교육을 해야 합니다. 자격증을 따는 교육이 아니라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 양성 교육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공업화를 추진하지만 기술을 아는 사람도 없고 그 기술을 어디서 도입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그 기술을 개발할 줄도 모릅니다. 지금은 기업과 학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최형섭 박사는 끝으로 “과학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야 하며, 그러자면 대통령이 선두에 서서 이런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최형섭 박사의 주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나중에 초대 연구소장 임명으로 이어졌다. 그해 2월 4일 오전 10시 한·미 두 나라는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연구소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과 버스틴 유솜 처장이 두 나라를 대표해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 따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은 급물살을 탔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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