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6>美 과학사절단 내한...美에 연구소 설립 보고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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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7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미국 과학사절단으로 내한한 린든 존슨 대통령의 과학기술특별고문 도널드 호닉 박사(왼쪽 두 번째) 일행과 환담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요란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은빛의 보잉707이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1965년 7월 8일 오후 5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그해 5월 18일 정상회담에서 발표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치를 논의하기 위해 내한한 미국 고위 과학사절단 6명이 탄 미국 대통령 전용기였다. 사절단은 미국 대통령 과학고문 호닉 박사와 그의 부인 릴리 호닉 박사, 피스크 벨 연구소장, 모스먼 록펠러재단 농업과학국장, 메이슨 바텔 연구소장, 마골리스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국 보좌관 등이었다.

공항에는 장기영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윤천주 문교부 장관, 최규남 과학기술연구소 설치 준비위원장, 윈스럽 브라운 주한미국대사 등이 나와 미국 과학사절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공항에서 호닉 박사는 기자들에게 방한 목적과 체류 일정에 관해 간단히 밝혔다. “한·미 두 정상이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종합과학기술연구소 설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 과학자와 교수, 기업인, 정부 측 인사와 만나 의견을 듣고 연구소와 기업을 방문한 후 과학기술연구소 설치를 위한 조치 방안을 미국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입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한국 측 준비 책임자이던 전상근 당시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의 회고. “저명한 과학자라면 칼날같이 날카롭고 깔끔한 타입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호닉 박사는 예상과 달리 마음씨 좋은 선교사 타입이었어요.” 전상근 국장은 호닉 박사 일행이 국내에 머무르는 동안 연구기관과 산업체를 방문하고 과학자와 교수, 기업인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도록 일정을 촘촘하게 짰다.

조선호텔에서 1박을 한 호닉 박사 일행은 9일부터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날 오전 주한 미국대사와 버스틴 유솜(USOM) 처장을 잇달아 만난 데 이어 오후에는 유솜에서 한국 과학기술 실태에 관한 브리핑을 받았다. 호닉 박사 일행은 10일 오전 정일권 국무총리 예방에 이어 오전 10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관한 제1차 한·미 공동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한국 측에서 장기영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박충훈 상공부 장관, 윤천주 문교부 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 최규남 준비위원장, 최형섭 원자력연구소장이 참석했다. 미국 측에서는 호닉 박사 일행,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 버스틴 유솜 처장이 참석했다. 전상근 국장은 그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재가를 받아 영문으로 작성한 한국 측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방안을 설명했다. 전상근 국장은 △한국 연구소 실태와 과학기술행정 △연구소 설립 필요성 △연구소 개요 △연구소 설립을 위한 한·미 협조 사항 등으로 나눠 설명했다.

전상근 국장이 설명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구소 현황= 한국 주요 과학기술연구소는 모두 86곳이다. 이 가운데 58곳이 국·공립 연구기관이고 나머지 28곳은 민간과 대학, 국업기업 부설 연구기관이다. 1964년도 주요 연구기관의 총예산은 11억2700만원이다. 이 가운데 83.3%은 국·공립 연구기관이 차지했다. 대학부설 연구기관은 6.6%, 민간기업 연구기관 3.7%, 국영기업 부설 연구기관 6.6%에 불과하다. 국내 연구소 가운데 원자력연구소와 금속연료연구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연구소가 예산을 연구소 관리 추진비로 사용한다. 국·공립 연구기관은 대부분 소속 행정부처 행정지원용으로 시험과 검정, 분석작업을 하는 등 기초연구나 응용·개발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과학기술 행정= 한국 과학기술 관련 헌법기관으로는 과학기술심의회의가 있다. 이 기구는 경제와 과학기술 정책에 관해 대통령 자문역을 한다.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은 국내 연구행정의 종합 조정과 과학기술정책을 수립, 시행한다. 과학기술 정책에 관한 실질적인 행정 집행은 문교부, 상공부, 보건사회부, 농림부, 원자력연 등 관계 부처와 행정기관 간 긴밀한 협조 아래 추진되고 있다.

◇과학기술연구소 설립 필요성= 대부분 연구 활동이 정부 소속 연구기관과 대학 연구소에서 수행한다. 정부 소속 연구기관은 기술과 행정지원을 하며 대학 연구소는 단편적이고 소규모 기초연구에 한정한다. 따라서 한국 산업발전에 직접 기여할 수 있는 실질적 과학기술 연구를 담당하고 어느 부처에도 속하지 않은 자율적인 연구소 설립이 절실하다. 해외 우수한 과학자를 유치, 활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을 갖춘 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 연구소는 산업계에서 요구하는 새로운 생산 공정과 원료, 제품 개발과 품질 향상 등을 해결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연구결과를 산업계에서 응용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연구소 개요= 과학기술연구소는 비영리 독립기관으로서 인사와 회계 처리를 자율로 하며, 연구 용역과 외국 원조 및 정부 지원으로 운영해야 한다. 업무는 산업기술과 응용과학에 관한 연구와 이와 관련한 기초연구, 국내 자원 개발을 위한 연구 조사, 연구 성과 보급, 공업재료와 제품 시험분석 등으로 한다. 연구 분야는 과학기술과 광공업, 약학, 해양 자원 분야 등이다.

◇연구소 설립을 위한 한·미 협조 사항= 연구소 설치와 운영은 한·미 공동투자로 한다. 미국 측은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연구기재와 시약 등을 부담한다. 또 연구소 설치와 운영을 위한 미국 전문가의 기술지도와 한국과학기술자의 해외파견 훈련에 필요한 경비, 해외 한국과학자 유치에 들어가는 모든 경비는 미국 측이 부담한다. 한국 측은 연구소 설치에 필요한 대지와 건물을 부담한다. 연구소 운영은 연구 용역과 자체 수입, 한·미 공동 지원으로 충당한다. 공동사업 추진을 위한 한·미 협정 체결을 추진한다.

이 자리에서 호닉 박사는 기술연구소 설립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피력했다. “연구소 운영의 자율성을 유지하려면 정부 간섭이나 정치적 입김을 최소화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호닉 박사는 그 방법의 하나로 연구소 운영이사회를 구성하고 정부에서 2명, 산업계에서 4명, 과학계에서 6명을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호닉 박사는 연구소 운영의 자율성 보장을 위한 방법으로 연구소 설립과 관련해 정부가 특별법을 제정하면 법률에 따라 정부 재정지원을 계속 받을 수 있고, 동시에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소 성공 열쇠는 시설이나 규모보다 우수한 과학자 확보와 이들을 효율적으로 조직화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뛰어난 지도력과 경영능력을 갖춘 유능한 소장을 찾는 일입니다.”

호닉 박사는 연구소와 대학은 유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되 연구소 내 모든 시설을 대학교수와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대학은 유능한 인재를 양성해 연구소에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날 한·미 공동회의에서 두 나라는 연구소 성격과 운영 방침에 원칙적인 공감대를 형성했다.

호닉 박사 일행은 이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박 대통령은 호닉 박사 일행과 오찬을 하며 환담했다. 오찬에는 장기영 경제부총리, 윤천주 문교부 장관, 최규남 준비위원장, 브라운 주한미국대사, 버스틴 유솜 처장 등이 참석했다. 호닉 박사 일행은 11일 판문점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최규남 준비위원장과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12일에는 서울대 공대와 원자력연구소, 금속연료연구소, 국립공업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시설을 둘러봤다. 13일에는 기업체를 방문했다. 14일에는 철도기술연구소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윤천주 문교부 장관을 예방해 환담했다.

제2차 한·미 공동회의는 15일 오전 9시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열렸다. 호닉 박사는 이 자리에서 연구소와 산업체 방문에서 느낀 점을 이야기했다. “방한을 통해 저는 아주 유능한 한국인 과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훌륭한 연구소를 설치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한국이 공업화해서 수출을 확대하려면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은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과학연구소는 독립적인 비영리기구로 하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연구를 진행해야 합니다. 연구소 설립에 관한 연락과 준비작업을 위해 유능한 대표를 한국에 파견하도록 미국 대통령에게 건의하겠습니다. 연구소는 앞으로 1년 이내에 설립하기를 바랍니다.” 호닉 박사 일행은 이어 청와대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해 이임 인사 후 오후 2시 미국 공군 특별기편으로 김포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해 8월. 호닉 박사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치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존슨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호닉 박사는 보고서에서 △연구소는 미국과 한국, 산업계의 재정 지원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전문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율성이 있어야 하며, 한국의 최고과학기술자 유치에 필요한 예산을 보장하는 비영리 독립기관이어야 하고 △연구소는 한국 산업계와 협조해서 국내 자원의 유용성을 증진시키면서 새로운 산업 활동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호닉 박사는 또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협조와 지원으로 한국에 응용과학과 공업기술연구소 설립을 추진할 것 △이를 위해 조속한 시일 안에 연구소 설립을 위해 한국을 지원하는 책임을 국제개발처(AID)에 부여할 것 △대통령은 AID가 지정한 미국 공업연구기관과 조속히 용역계약을 체결해서 한·미 공동 지원사업의 기간과 범위를 제시할 것 등을 건의했다. 호닉 박사 등 사절단 건의에 따라 존슨 미국 대통령은 그해 9월 베텔기념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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