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R&D 협의체' 출범, 국가 R&D 패러다임 대전환 신호탄

기업이 국가 R&D 전 주기에 참여
수요자서 정책방향 설정 주역으로
산업 분야별 '퍼실리테이터' 도입
미래 신산업 분야 투자전략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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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중립과 스마트 센서 분야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민간R&D협의체 출범식이 30일 서울 강남구 엘타워에서 열렸다. 구자균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장(앞줄 왼쪽 여섯번째부터)과 김성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과학기술혁신본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김민수기자 mskim@etnews.com

산업별 민간R&D 협의체 출범은 국가 연구개발(R&D) 패러다임 대전환을 의미한다. 정부가 주도한 기획, 평가, 기술 수요 발굴 등 R&D 전 주기에 수요자인 기업이 참여함으로써 산업계 인식, 제안이 정책에 반영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R&D 효율성 저해 요인으로 지목된 정부와 기업 R&D 간 중복 등 문제도 상당부분 해결할 것으로 기대된다.

구자균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장은 “국가 연구개발 정책 추진에서 기업 의견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정부 입장에서 기업의 단편적 의견은 정책화하기 어렵고 기업입장에서는 민간 의견을 정부에 정확히 전달할 창구가 부족하다고 느껴왔다”고 토로했다.

구 회장은 “정부에 기업 의견을 전달하고 현안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협의체 출범은 매우 중요한 시도”라며 “협의체는 기업으로만 구성돼 자유로운 의견 개진이 가능하고 이를 조율해 정부에 종합적으로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파격 시도이자 정책 수요자에 머물러 있던 기업이, 정책방향 설정의 주역으로 변하는 계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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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형 R&D 한계…민관 협업 구조로 대응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원회의를 주재하며 “민간 R&D 투자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며 “국가 과학기술 역량을 정부가 주도하는 시대는 끝났다. 정부는 민간 R&D 역량을 궤도에 오르게 하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 대확산과 미·중 무역갈등 등으로 불확실성이 커지고 디지털전환이 기술 복잡성을 확대하며 정부가 주도하는 R&D 투자 방식이 한계에 봉착한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전문가도 정부가 R&D 방향, 전략을 수립한 뒤 간담회 등으로 산업계 의견을 산발적으로 수렴하는 기존 관행으로는 점차 고도화하는 산업 기술 R&D 수요를 정책에 반영하기 어려워졌다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국가 기술개발 로드맵은 정부와 출연연구기관 주도로 미래 산업과 기술 발전에 대한 기획을 통해 수립했다. 관련 R&D는 출연연구기관과 대학 위주로 진행됐고 기업은 보조 역할에 머무르는 측면이 있었다. 이에 개발 기술을 사용해 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선 입맛에 맞는 기술을 찾기 어려웠다. 정부 R&D와 기술 수요자인 기업간 괴리가 분명했다는 의미다.

민간R&D 협의체는 이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R&D 정책이 기업의 실제 수요에 부합하고 나아가 관련 생태계 조성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신기술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기술개발 로드맵을 수립, 기술 개발·상용화 구조를 고도화하기 위한 전략 일환이다.

민간R&D 협의체는 과기혁신본부·R&D 사업부처와 △R&D 전략 수립 △사업 기획 △점검·환류 등 R&D 전 주기에 참여한다. 기업이 분야별 기술 로드맵과 R&D 수요를 제안하면 정부가 투자 전략과 연도별 투자 방향에 반영한다. 각 부처는 협의체가 제안한 R&D를 반영해 신규 사업을 기획하고, 과기혁신본부는 예산 배분·조정에 이를 연계한다. 협의체는 부처 R&D 사업에 제시한 기술 수요가 반영되는지 검토하고 차년도 예산 배분·조정 관련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

협의체 조직은 시장환경 분석, 기술수요 도출을 위해 주요 선도기업의 기술임원, 임원으로 주성된 분야별 실무위원회와 전문위원회로 구성했다. 전문위원회는 기업 간 협의를 통해 기술수요를 도출하고 기술 우선순위, 민·관 수행주체 제시 등 역할을 한다.

실무위원회는 기업별 기술수요 정리, 관련 기술·시장·산업환경 정보 수집 등 지원 업무를 수행한다. 기술, 정책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자문회위원회도 구성했다. 기술 수요 조사, 의견 수렴 단계에선 관련 협회·단체도 참가한다.

협의체 운영상 특징은 산업 분야별로 경험이 풍부한 '퍼실리테이터'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퍼실리테이터는 기업에서 5년 이상 실무경험이나 연구경력을 쌓은 산학연 전문가로 기업 경영, R&D 행정 경험을 두루 갖췄다. 실무의견 조율, 협의 과정 정리, 전문위 보고 등에 참여한다.

협의체 업무는 3단계로 구분된다. 먼저 국내외 기술, 시장 현황과 유망 기술 분석을 통해 주요 R&D 기술 수요와 정부 R&D 사업 수요를 구분, 정리한다.

이후 전문위원회 논의를 거쳐 기술 중요도, 성숙도에 따른 민관 R&D 투자방향, 핵심 R&D 리스트를 도출한다.

이어 민관이 참여하는 R&D 혁신 포럼을 개최해 협의체별 전문위원장이 R&D 현안 분석, 핵심기술 확보 로드맵, 정부 R&D 수요 발굴이 담긴 최종보고서를 발표, 제안하고 관계부처가 사업을 기획하게 된다.

◇탄소중립, 스마트센서 2개 분야로 출범…점차 확대

정부는 탄소중립과 스마트센서 R&D 협의체를 우선 발족, 시범 운영한다. 2개 분야가 민간R&D협의체 대상으로 우선 선정된 것은 국가·산업 측면에서 최대 현안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출범으로 외교·통상 분야에 온실가스 저감이 중대 변수로 떠올랐다. 시멘트, 철강, 발전 등 온실가스 다배출업종은 온실가스 감축이 주요 과제로 부상했지만 구체적 감축 기술 개발은 요원하다.

탄소중립 협의체는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등 핵심 기술 개발에 있어 정부와 기업 간 R&D 역할분담 방안, 핵심 수요 기술 등을 제시한다.

협의체 조직은 탄소발생저감, 발생탄소처리, 에너지대체 관점에서 산업공정혁신, CCUS, 신재생에너지 3개 분과로 구성, 운영한다.

산업공정혁신은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등 고탄소산업군 탄소저감 및 저탄소신공정 등을 개발한다. CCUS 분과는 이산화탄소 CCUS 기술 동향을 파악, 국내 환경에 가장 적합한 기술 개발 방향성을 제시한다. 신재생에너지 분과는 수소, 풍력, 태양광 등 그린에너지 생산, 저장부터 신전력계통 관련 R&D 전략을 수립한다.

산업 분야에선 데이터를 인지·수집하는 스마트센서가 핵심 부품으로 급부상했다. 2025년 센서 사용량이 1조개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센서 분야 국내 기술 수준은 미국, 일본 등 주요국 대비 65%에 불과하다는 게 정부 조사 결과다. 정부와 협의체는 모바일·가전, 자동차, 바이오헬스, 스마트제조 등 4대 전략 분야별 유망 핵심 센서 도출을 통해 센서 소자부터 솔루션까지 전 주기 기술 개발에 나선다.

스마트센서 분야는 센서 활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스마트기기, 자동차, 바이오헬스, 스마트팩토리 분야 기업을 망라해 구성했다.

스마트폰을 비롯한 통신, 가전 등 IT에 적용하는 이미지, 지문, IoT 센서와 자율주행, 수소차핵심 기술로 주목받는 라이다 센서, 화학·가스 및 회전모션 센서 관련 R&D 전략을 도출한다.

과기혁신본부는 향후 산업 특성, R&D 수요 등을 감안해 협의체를 다각화할 계획이다.

시스템반도체, 미래차, 바이오헬스(BIG3) 등 미래 신산업 분야에서 10개 이상 투자 전략을 수립한다는 목표다. 파급력이 크지만 해외 기업과 기술 격차가 뚜렷하고 관련 산업 생태계 기반이 취약한 기술을 우선순위에 뒀다.

◇정책 일관성, 기업 보안 확보는 숙제

민간이 주도하는 R&D 정책 수립 체계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정책 일관성이 유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 국가적 기술 개발 사업이 정권 혹은 장관 교체로 방향성이 급변하는 전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기업 기술 개발 로드맵은 장기간 일관성을 유지, 민관이 꾸준하게 기술 개발에 나설 수 있는 안정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형 기술은 기초연구에서 실용화까지 10년 이상이 소요되기 일쑤다. 장기적 국가산업 발전 관점에서 수립한 기술 계획이 흔들릴 경우에 사업에 착수한 기업 피해는 물론 관련 산업 경쟁력도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안 유지도 관건이다. 기업 상호 간 경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술 개발은 철저하게 관리하고 여러 기업이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기술은 장기·기초 연구과제로 도출, 대학과 전문연구기관이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제언했다.

권오준 포스코 전 회장은 “장기적 국가산업 발전 관점에서 만들어진 기술계획 근간이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추진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협의체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신기술을 제시하고 이것이 국가 기술개발 로드맵 바탕이 돼 개발이 된다면 기술 개발에서 활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노력이 원활하게 이어지면서 활용성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칠희 네패스 회장은 “협의체는 좀 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며 “단기 성과에 집중해서 논의한다면 협의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5년, 10년 후를 대비한다는 생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호기자 snoop@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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