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부터 이어온 각 살린 몸체
알루미늄 바디로 경량화 성공
퍼스트클래스급 승차감 제공
최고출력 525마력의 '슈퍼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전문 브랜드 랜드로버 플래그십 모델 '레인지로버'가 출시 50주년을 맞았다. 1970년 6월 17일 첫선을 보인 레인지로버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 면에서 혁신을 통해 럭셔리 SUV라는 새로운 세그먼트를 선도해왔다.
지난 50년 레인지로버는 다양한 세계 최초 기술을 적용하며 럭셔리 SUV 시장을 개척했다. 1세대 레인지로버는 상시 사륜구동 시스템과 ABS 브레이크를 처음 적용해 앞선 기술력을 과시했다. 전자 트랙션 컨트롤(ETC)과 전자식 에어 서스펜션을 장착한 것도 레인지로버가 최초다.
2012년 등장한 4세대 레인지로버는 SUV 가운데 처음 경량 알루미늄 바디 구조를 적용해 기존 모델보다 420㎏을 경량화하는 데 성공했다. 안정적 오프로드 주행을 돕는 전지형 프로그레스 컨트롤과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2 등 다양한 주행 안전 기술로 럭셔리 SUV 선구자임을 증명했다.
이번에 시승한 차량은 2020년형 레인지로버 라인업 가운데 '5.0SC 오토바이오그래피 롱 휠 베이스(LWB)' 모델이다. 일반 모델보다 전장과 축간거리가 200㎜ 길어 실내공간을 극대화했다. 차체 크기는 전장 5200㎜, 전폭 1985㎜, 전고 1840㎜, 축간거리 3120㎜에 달한다.
레인지로버 디자인은 전통을 강조한다. 50년 전 처음 등장한 1세대부터 이어져 온 디자인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4세대까지 세심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도로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네모 반듯하게 각진 디자인과 정교한 선 처리, 한 장의 알루미늄판으로 제작한 긴 보닛이 한 눈에 봐도 레인지로버임을 나타낸다.
실내는 고급 요트처럼 호화롭다. 매끄러운 질감의 인테리어 소재에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완성한 실내 곳곳에서 럭셔리 SUV다운 고급스러움이 묻어난다. 특히 뒷좌석에 앉으면 항공기 퍼스트클래스가 부럽지 않다. 시승차인 LWB 모델은 1.2m가 넘는 뒷좌석 무릎 공간을 갖춰 운전기사를 두고 타는 쇼퍼드리븐으로도 손색이 없다.
부드러운 세미 아날린 가죽으로 마감한 뒷좌석은 40도까지 젖혀지는 파워 리클라이닝 기능에 마사지 기능, 발·다리 받침대를 갖춰 퍼스트클래스 승차감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원터치 방식으로 작동하는 조수석 시트 이동 장치를 통해 1열 조수석을 앞으로 최대한 밀어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다.
오디오나 에어컨, 시트 조절 등 실내 대다수 제어장치는 전동식 버튼을 사용한다. 처음 차량을 타고 버튼이 너무 많아 조작에 애를 먹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2020년형부터 애플 카플레이를 새롭게 적용해 티맵과 카카오내비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점도 편리했다. 전화나 문자, 음악, 일정 등도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이용할 수 있다. 리어 시트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은 기존 8인치에서 10.2인치로 커졌다.
시동을 걸면 보닛 아래 숨겨진 커다란 엔진이 으르렁거리며 깨어난다. 배기량이 5.0ℓ에 달하는 V8 슈퍼차저 가솔린 엔진이다. 8개의 실린더가 뿜어내는 웅장한 엔진음이 인상적이다. 최고출력은 525마력, 최대토크는 63.8㎏·m로 제원 수치로만 본다면 슈퍼카급이다.
수치만으로 이 차의 주행성능을 평가하긴 어렵다. 다른 차량보다 월등히 높은 힘을 지녔음에도 실제 설정은 편안하고 여유로운 승차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묵직한 럭셔리 세단처럼 부드럽게 속도를 높인다. 물론 넉넉한 힘 덕분에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스트레스 없는 급가속도 가능하다. 그러나 편안한 승차감 덕분에 시승 내내 굳이 빠르게 차를 몰진 않았다.
과속 방지턱을 넘을 때면 이 차가 추구하는 승차감의 지향점이 느껴진다. 에어 서스펜션 방식으로 전륜에 더블 위시본, 후륜에 인테그럴 링크를 장착했는데, 높은 방지턱을 큰 흔들림 없이 부드럽고 편안하게 넘는다. 방지턱이 많은 우리나라 도로 환경에 최적화된 세팅이다.
귀막이를 하고 차량을 탄 것처럼 외부 소음은 극도로 차단했다. 옆 차선에 대형 트럭이 주행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다. 21인치 휠과 타이어를 사용하지만 노면에서 올라오는 마찰음도 잘 걸러준다. 시트가 바닥 부분과 일정 간격을 두고 있어 구름 위를 떠가는 것처럼 진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고속도로에서는 반자율주행에 가까운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스티어링 어시스트를 사용해 주행했다. 레이더 기술을 바탕으로 전방 주행 차량 속도를 파악하고 교통 정체로 전방 차량 주행이 멈출 경우 완전히 정차한다. 스티어링 어시스트는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작동하며, 최대 200㎞/h까지 조향을 지원해 차선 중심으로 차량을 유지해준다. 차선이 감지되지 않으면 전방에 있는 차량을 따라가기도 한다. 덕분에 장거리 주행에도 피로감이 적게 느껴졌다.
매일 퍼스트클래스에 탈 수 있는 특권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 시승차 가격은 2억4310만원에 달하며 복합 연비는 5.6㎞/ℓ에 머문다. 시승 당일 시내에선 5㎞/ℓ, 고속도로에선 8㎞/ℓ 수준의 연비를 기록했다. 머지않아 전기차 버전으로 경제성까지 높인 레인지로버를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
정치연기자 chiye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