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 여자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사라 제시카 파커 분)는 구두 수집광이다. 마놀로 블라닉의 '킬힐'을 소울 슈즈(soul shoes)라며 사랑했다. 로저 비비에, 지미 추도 이에 질세라 '더 높은 굽'으로 경쟁했다. 하이힐을 여자의 자존심과 비교했다. 세련된 도시 여성 이미지로 포장했다. 힐을 신은 여성의 발목과 종아리는 광고에서 '섹시하게' 표현했다. '힐'은 여성성의 이데올로기였다.
토리버치 시그니처 상품은 굽 없는 플랫 슈즈(Flat Shoes)다. 섹시하지 않다. 디자인이 단순하다. 동그란 금장 안에 'T'자를 아래위로 겹쳐놓은 로고 두 개가 전부다. 키 작은 여성을 위한 슈즈가 아니었다. 발레리나 슈즈로도 불리는 리바 슈즈(Reva Shoes)는 내놓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킬 힐이 세계 구두시장을 점령할 때였다. 키 작은 여성도 굽이 없는 리바 슈즈만큼은 갖고 싶었다. 리바 슈즈는 토리의 어머니 리바 여사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토리버치' 브랜드는 2004년에 탄생했다. 토리버치는 프레피-보헤미안 럭스(Preppy-Bohemian Lux)를 표방한다. 절제된 편안함을 추구한다. 상류사회 패션을 재해석한 프레픽 룩과 자유로운 영혼을 담은 보헤미한 룩의 조화는 토리의 삶이 투영된 것이다. 토리의 정체성이다. 디자이너이자 CEO인 토리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다. 사업 경험도 없다. 결혼 후 줄곧 여섯 아이를 키우며 전업주부로 살았다.
그녀는 승마와 테니스를 즐기는 금수저, 젯셋족(전용 제트비행기 타는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거액의 유산을 받은 제조회사 사장이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배우로 활동했다. 부유하게 자란 덕분일까. 토리의 성격은 상냥했다. 패션 감각은 뛰어났다. 어릴 적 친구들은 그녀의 옷차림과 말투, 행동을 따라했다. 토리스타일(Torywear)이라 불렀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문화, 예술에 관한 안목을 길렀다. 부잣집 외동딸의 해외여행은 현장체험학습이다.
'창의'와 '개성'으로 평가받는 패션업계는 의외로 보수적이다. 패션관련 학과를 나오거나 오랜 시간 그 계통에서 노하우를 쌓아야 한다. 뛰어난 디자이너 상당수는 시간과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패션계는 텃새가 심하다. 실력과 인고의 시간이 비례하는 곳이다. 손은 디자인, 발은 유통하는데 써야 한다. 동네 의상실이라면 몰라도 브랜드 론칭은 전쟁 무용담 수준이다. 토리는 대학 졸업 후 어머니의 단골 의상실에서 조수로,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로, 랄프로렌 등에서 카피라이터와 홍보 일을 배웠다. 짧은 경험이었다.
물론 토리도 손과 발을 쓴다. 자신의 상품이 발매될 때마다 사교계를 돈다. 액세서리부터 발끝까지 토리버치 뮤즈가 돼 홍보한다. 뉴욕 사교계도 그녀를 따라한다. 화려한 외모와 세련된 매너, 넘치는 자신감에 압도된다. 토리의 어릴 때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리 버치는 트렌드에 집착하지 않는다. 토리 패션 규칙은 오직 편안함이다. 유행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영감을 따른다. 스터디셀러인 토리 튜닉은 어머니가 모로코 벼룩시장에서 사 온 옷에서 힌트를 얻었다. 오프라 윈프리가 칭찬하면서 스타덤에 오른 아이템이다. 토리의 세계관은 '럭셔리가 곧 편안함'이다. '킬힐'은 예쁘지만 불편하다. 허리와 발목 부담을 감수하고 신는다. 편안한 낮은 굽의 자신감, 연령을 초월한 토리의 공감 포인트다.
박선경 인터랙티브 콘텐츠학 박사 sarahs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