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사업에 처음 뛰어들었을 당시 세계 반도체 강자였던 일본과 미국은 한국의 무모함에 코웃음을 쳤다. 특히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빈약한 기술 등 5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의 반도체 불가론을 내놓기도 했다. 기술도 없고 전문인력도 없던 한국이 지금처럼 세계 메모리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세계 반도체 산업사를 바꾼 획기적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이 개발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64K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김광호 초대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전 삼성전관(현 삼성SDI) 회장)은 삼성반도체통신에서 64K D램 개발을 주도하는 등 삼성의 초기 반도체 사업 성공을 이끈 주역이다. 64K D램 개발은 한국 메모리반도체 신화의 포문을 연 역사적인 산업 성과로 기록돼 있다. 그로부터 36년이 훌쩍 흐른 지금 김광호 전 회장은 최근 벌어진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참으로 안타깝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첨단기술은 기업 간 '공존'이 중요”
“일본이 처음부터 반도체 장비·부품·소재 분야 원천기술을 확보한 강자는 아니었다. 당시 반도체 선두주자인 미국으로부터 후발인 일본이 주요 원재료를 대부분 수입했다. 미국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소위 '반도체 전쟁'이 벌어졌다. 일본이 세계 반도체 시장을 미국과 양분할 정도로 성장하자 미국이 견제한 것이다. 원재료 수출을 제한하면 일본이 반도체 생산을 못 할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밖에서 볼 때는 서로 견제하고 싸웠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협력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과거 사례를 들며 최근 벌어진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와 백색국가 제외 조치가 선진국가가 행한 조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 간 '기술 공존'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는 수없이 많은 공정과 재료가 서로 어우러져 탄생한다. 특정 기술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는 '독립'이 맞지만 엄밀히 첨단기술 제품을 생산하려면 독립이 아닌 '공존'이 필요하다. 일본과 갈등이 계속되더라도 그 문제는 풀어나가되 각 기업 간 협력은 계속돼야 한다. 기술은 공존이 중요하다.”
◇“위험 각오한 국산화 의지 안 보여…중기 제품 써줘야 발전”
김광호 전 회장은 반도체 관련 협력사들이 함께 성장하고 주요 장비를 국산화하는 토대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삼성은 반도체 사업 초기 당시 장비와 원재료를 모두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 비교적 쉬운 것부터 하나씩 국산화하고 외산 장비는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유도해 전문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효과를 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전략은 추후 한국 반도체 생태계 기업들이 국산 제품을 개발하는 밑받침이 됐다.
김 전 회장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정부가 연구개발(R&D)로 지원하는 삼각편대 체계가 중요하다고 단언했다.
대기업은 당장 중소기업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열린 자세로 협력하지 않으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단기에 연구개발 성과를 끌어내는데 조급해하지 않고 길고 꾸준하게 지원할 수 있는 장기 지원 체계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첨단기술 연구개발의 흐름이 꾸준히 이어지는 문화와 체계가 절실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중소기업과 협력한 사례 중 재직 당시 신성이엔지의 팬필터유닛(FFU) 도입 당시 상황을 회상하기도 했다.
“당시 클린룸을 조성하는데 클린룸 내 공기를 정화하는 FFU를 전량 일본에 의존했다. 국내 기업인 신성이엔지가 이걸 개발했는데 모터 회전 소음이 심해서 실무진은 쓰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모터 소음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해결하는 전제로 발주부터 확정했다. 실무진은 당시 불만이 많았지만 이렇게 개선하고 밀어부치지 않으면 영영 국산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현재 신성이엔지는 세계 FFU 시장 점유율 1위다. 여러 해외 선두 경쟁사가 있었지만 후발주자인 신성이엔지가 세계 시장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한 것이다. 당시 삼성의 적극적인 지원과 과감한 투자 결정, 이에 발맞추기 위한 신성이엔지의 노력이 합쳐진 결실이다.
김 전 회장은 최근 대기업이 단기 성과를 중시해 공급망 교체를 두려워한다고 지적했다. 예전만큼 적극적으로 국내기업 제품을 사용하기 위해 협력하고 밀어주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이미 검증된 외산 제품을 쓰며 안정을 추구하는 문화가 강해졌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안정만 추구하게 된 원인을 '실패 극복을 독려하지 않는 기업·사회의 문화'로 지목했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새로운 도전의 70%는 실패한다. 사실 30%만 성공해도 대성공이다.
그럼 70%의 실패를 어떻게 해야 할까. 기업이든 국가든 실패를 독려하고, 또 실패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집중하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 실패했다는 이유로 연봉을 삭감하거나 자리에서 내쫓는 방식은 안 된다.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더 노력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김 전 회장은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 상생협력이 실제 이익으로 연결되려면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고 봤다. 선진 기업과의 합작, 국내 투자 유치 등 끊임없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사업 환경을 조성해야 대·중소기업이 함께 성장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또 한국 대기업은 특유의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이 향후에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강점으로 작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고(故) 이병철 회장 일화를 소개했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후 주변 시선은 부정적이었다. 후발주자여서 기술이 충분하지 않아도 제품을 생산해야 하는 시기였다. 손실이 나는데 거액의 투자가 필요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이 '자금조달과 손익은 내가 책임질테니 당신은 걱정말고 기술개발, 인력양성, 제품판매를 책임지라'고 했다. 경영자의 핵심 역할인 자금조달과 손익을 전적으로 감당하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사방에서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곧 망할 것,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등 우려가 많았다. 이 회장은 주변 반응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며 사업을 밀어부치고 투자를 집행했다. 그 결과 단기간에 사업이 흑자로 돌아섰다.”
이건희 회장은 파격적인 의사결정으로 삼성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고 회상했다.
“당시 의사결정이 정말 빨랐다. 보통 대기업은 결재 라인이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리는데 삼성은 결재가 순식간에 이뤄졌다. 결재권자들이 모두 모이면 기안자가 설명한 뒤 쫙 싸인하는 형태였다. 회장은 서류에 싸인없이 구두로 보고받고 결정할 정도였다. 심지어 5000만달러 이하 규모 투자는 마음대로 결정하라는 권한까지 받았다. 이런 문화가 없는 일본 기업에게는 생소하고 충격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백년대계 정신, 정부·기업·교육서 모두 필요”
김광호 전 회장은 한국이 반도체 산업 후발주자로 출발해 세계 1위로 올라선 핵심 요인 중 하나로 러닝커브를 착실히 쌓은 것을 꼽았다.
“사업 초기에는 아무도 선진 기술을 가르쳐주거나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시장에 유통되는 칩을 구해 유사하게 흉내내는 데드카피를 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부터 하나씩 기술을 습득하며 축적한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이 향상됐다. 완성도는 부족했지만 삼성이 개발한 반도체를 계열사가 채택하고 부족한 점을 피드백하고 이를 개선하며 러닝커브가 가팔라졌다.”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과 협력해 일부 장비·소재를 국산화하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삼성뿐만 아니라 협력사가 함께 기술력을 축적하며 성장했다.
지금은 어떨까. 김 전 회장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기술 중 상당수가 단절돼 한스럽다”며 안타까워했다.
“기업·정부 모두 과거 세대가 해온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새 시대에 새로운 것을 하겠다며 과거의 것을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술, 연구개발, 국산화 등에 대한 노력이 쭉 이어지면서 여기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나가야 하는데 기존에 없던 전혀 다른 것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어찌보면 과거의 것을 잘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우리나라 최대 약점이다. 우리의 현재는 과거의 선배들이 썼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단기로 자금을 투입하고 의지를 다진다고 해서 반도체 사업이 성공할 수 있는게 아니다. 착실히 러닝커브를 쌓는게 성공 비결이다.”
그는 일본 정부의 백색국가 제외 조치 이후 '기술독립'이 핵심 키워드가 됐지만 정작 근본 바탕이 되는 기초 기술 교육을 우대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아무리 새로운 첨단 기술이라 해도 바탕은 기초 과학이다. 기초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초 기술을 꾸준히 쌓지 않으면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하기 어렵다. 일본이 원천기술에 강한 것도 기반 기술을 중시하고 다져나가는 문화가 잘 형성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우리나라가 기초 과학이나 기초 기술을 집중 연구하며 기반을 닦는 인재를 우대하는 문화나 제도가 잘 돼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을 우대하지 않았으면서 기술독립, 기술자립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실력있는 학생들이 기초연구 분야를 지향할 수 있도록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그는 정부가 백년대계 관점에서 기초 교육을 강화하고 인재가 유입될 수 있는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정권이 바뀌면 교육 정책이 바뀌는 등 단기 시각에서 벗어나 교육 백년대계를 제대로 세우고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지원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담=양종석 미래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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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배옥진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