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37주년:기술독립선언Ⅰ] 르포/에스피지·해성티피씨, 로봇 감속기 양산 '구슬땀'

#지난 7월 일본이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수출을 제한한 가운데 로봇 산업도 일본 의존도가 높은 분야로 지목됐다. 특히 일본 업체가 세계 시장을 좌우하는 로봇용 감속기는 아킬레스건으로 꼽혔다. 일본 업체가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로봇용 감속기 시장에서 국산 기술을 묵묵히 개발하고 있는 국내 업체들이 있다. 인천 남동 국가산업단지에서 감속기 양산을 준비하는 에스피지(SPG)와 해성티피씨 제조 현장을 방문해 바쁜 현장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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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위치한 에스피지 로봇용 감속기 생산현장에서 직원이 설비를 살펴보고 있다.

◇기어드 모터 강자 에스피지, 로봇용 감속기 양산 도전…月 1만대 생산능력 갖춰

인천광역시 남동 국가산업단지는 '갯벌'이 있던 자리였다. 1985년에서 1997년까지 순차적으로 조성된 공업단지에는 기계, 철강조립, 금속 기업을 중심으로 6000여개 기업이 빽빽이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인 중국과 가까이 자리했고, 경기 반월시화 국가산업단지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급 기술 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에스피지는 인천 남동 국가산업단지 중심부인 고잔동에 생산시설을 갖췄다.

에스피지는 1991년 설립한 명진전자가 전신이다. 기어드 모터를 제작하며 기술력을 축적했다. 기어드 모터는 전동기와 감속 기어 장치를 하나로 결합한 장치로 공장 컨베이어 벨트와 자동문 등 산업 현장과 냉장고, 정수기 등 가전제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는 핵심 부품이다.

에스피지는 최근 주력 사업으로 로봇용 감속기를 시작했다. 감속기가 기어드 모터 부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관련 기술은 이미 갖췄다. 에스피지는 2015년 협동로봇에 쓰이는 소형 로봇용 감속기를 중심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현재 감속기 70종을 개발했고, 이를 국산기술로 양산할 수 있는 생산 시설을 갖췄다.

에스피지가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감속기 물량은 하모닉 드라이브 기준 1만5000대 수준이다. 제품 샘플 테스트를 넘어 실제 로봇용 감속기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일 만한 초도 물량 설비를 갖췄다.

여영길 에스피지 대표는 “2015년 로봇용 감속기 개발을 시작한 이후 현재 로봇용 감속기를 연간 1만5000대 양산할 수 있는 생산시설을 구축했다”면서 “현재 송도에 있는 R&D센터에서 연구 인력을 투입해 로봇 감속기 기술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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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위치한 에스피지 로봇용 감속기 생산현장에서 직원이 3차원 계측기를 활용하고 있다.

실제 기자가 둘러본 인천 남동구 에스피지 생산공장 곳곳에 로봇용 감속기 샘플이 놓여있었다. 에스피지에 따르면 로봇용 감속기는 외치기어(flex spline)와 내치기어(circular spline)를 만들기 위한 '단조→가공→열처리→추가 가공→치절(호빙)'에 이르는 공정을 거친다. 이후 두 부품을 조립하고 편심체를 삽입해야 한다. 에스피지는 이 공정을 진행하기 위한 설비와 연구개발 등에 총 120억원을 투자했다.

감속기는 기어를 활용해 속도를 떨어뜨리고 로봇·기계 움직임을 조절하는 데 쓰이는 핵심부품이다. 로봇용 감속기는 작고 가볍고 정밀한 '하모닉 드라이브'와 정밀도가 상대적으로 낮지만 힘이 좋은 '사이클로이드 드라이브(RV)' 감속기로 나뉜다. 하모닉 드라이브는 통상 가반중량(로봇이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 20㎏ 이하 소형 협동로봇에서 주로 쓰이고, RV 감속기는 가반중량 20㎏ 이상인 묵직한 산업용 로봇에서 활용한다.

하모닉 드라이브와 RV 감속기는 일본 업체가 세계 시장을 주름잡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큐와이리서치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세계 하모닉 드라이브 시장은 일본 하모닉드라이브시스템즈(HDS)가 73.3%를 차지했다. 이어 일본 니덱-심포가 11.2%, 중국 리더드라이브가 11.1%로 뒤를 이었다. RV 드라이브 시장도 일본 나브테스코가 세계 시장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2년이 지난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애초에 하모닉드라이브라는 부품 명칭 자체가 일본 회사 이름에서 따올 정도다. 이 때문에 로봇용 감속기 시장을 반독점하는 일본 하모닉드라이브와 나브테스코는 국내 수요기업과 협상에서도 '고자세'를 유지한다.

에스피지는 이같이 일본 업체가 반독점하는 감속기 시장에서 양질의 감속기를 생산하기 위해 4년간 R&D와 제품 개발, 양산, 신뢰성 테스트를 거쳤다. 10~200나노미터(㎚)급 고정밀 구동이 가능한 하모닉 드라이브 일종인 'SH 감속기' 60종과 중·대형 산업용 로봇에 쓰이는 RV 감속기인 'SR 감속기' 10종을 개발,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제품 공급을 타진한다.

여 대표는 “기본적으로 1만 시간 사용을 보장하는 로봇용 감속기를 만들기 위해 투자를 단행했다”면서 “현재 자체 신뢰성 테스트까지 끝났고, 조만간 해외 시장에 로봇용 감속기를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에스피지는 기업 규모가 크고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 지난해 매출 3054억원을 기록했다. 2012년 매출 1046억원을 기록한 이후 지속적으로 매출이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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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있는 해성티피씨 생산공장에 RV 감속기가 진열돼 있다.

◇해성티피씨, 로봇용 감속기 기술 10년 넘게 축적…RV 감속기 사업 재개

해성티피씨는 인천 남동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감속기 전문회사다. 1991년 설립한 해성산업이 전신으로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 주차타워에 쓰이는 감속기를 주로 생산해왔다. 2005년 수직다관절 로봇에 쓰이는 감속기 개발을 시작했다. 국내 업체로는 가장 오래된 업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산업용 로봇에 쓰이는 RV 감속기 30종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연간 양산 능력은 6000대로 적지만 향후 충분히 생산을 확대할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해성티피씨는 RV 감속기에 쓰이는 '사이클로이드(cycloid)' 치형 설계를 독자 기술로 구현한다. 치형은 감속기를 둘러싸는 톱니바퀴 같은 부분으로 감속기 성능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해성티피씨는 오토캐드와 솔리드웍스, 구조해석 프로그램, 치형 설계 프로그램 등을 조합해 자체적으로 사이클로이드를 설계한다.

이성섭 해성티피씨 산기영업팀 부장은 “사이클로이드 치형 설계와 연마는 만만치 않은 부분”이라면서 “해성티피씨는 기존 설계 프로그램을 조합한 자체 설계프로그램으로 사이클로이드를 정밀 설계한다”고 밝혔다.

인천 남동구 해성티피씨 생산공장을 살펴보니 에스피지와 달리 비교적 묵직한 로봇용 감속기 부품들이 정리돼 있었다. 해성티피씨는 산업용 로봇에 쓰이는 로봇용 감속기 중에서도 가반중량 165~800㎏대 제품을 주로 공급한다. 최근 중국 로봇업체에 로봇용 감속기 부품을 공급하며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해성티피씨는 국내에서 선도적으로 로봇용 감속기 기술을 개발한 기업이다. 2013년 국내 한 로봇업체에 RV 감속기를 공급한 바 있다. 그러나 2015년 법정관리에 들어서며 기술이 단절될 위기에 놓였었다. 당시 승강기 사업부문 실적이 감소하면서 타격을 받으면서 부침을 겪었다. 2017년 자동차 부품 업체 티피씨글로벌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경영상황이 안정화됐다. 현재는 예전에 끊어진 거래 관계를 복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해성티피씨는 10년 넘게 쌓아온 기술력과 공급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RV 감속기 공급 확대를 타진한다. 성장세가 가파른 중국 산업용 로봇 시장에도 공급 확대를 노린다.

이건복 해성티피씨 사장은 “일본 수출 규제 이후로 국내 회사에서도 로봇용 감속기에 대한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면서 “중국은 물론 국내 시장에도 로봇용 감속기 공급을 확대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인천=


변상근기자 sgb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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