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입국 기술자립(科學立國 技術自立)'. 1966년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내세운 '자립'의 가치가 50여년 지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일본의 무리한 수출규제가 소재·부품·장비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출연연은 지난 세월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화 초석을 다진 곳이다. 2000년대 이후 굵직한 성과가 줄어들면서 역할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려면 연구개발(R&D) 생산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빗발치면서 다시금 R&D 핵심 기관으로 주목받고 있다. '출연연이 기술독립군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출연연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 수입 의존도가 높은 기술 분야에서 자립을 쟁취하는 주력군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소·부·장' R&D 핵심은 출연연
정부는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해 지난달 28일 관계부처 합동으로 소재·부품·장비 R&D 혁신대책을 발표했다. 지난 50여년 세월 동안 기술 국산화와 관련 산업 생태계 육성에 힘쓴 출연연을 주된 R&D 역량·자원 거점으로 설명했다.
다수 출연연 기관을 국가 R&D 역량 총동원을 위한 국가 연구실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화학연구원, 재료연구소,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등을 기술 자립을 위한 연구·정책지원 거점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정부는 또 출연연 연구시설을 핵심 소재와 부품 상용화 개발을 위한 주요 테스트베드로 지정해 활용할 계획이다. 산업체 기술 애로사항 해결에도 출연연 자원을 적극 활용한다.
출연연이 주목받은 이유는 단순히 지난 역사 때문이 아니다. 25개 출연연이 이미 진행한 R&D, 보유 기술이 일본의 위협 대응에 상당 부분 도움을 줄 수 있다. 전체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출연연은 '일본 수출규제 관련 추가 규제 가능 품목' 총 236개 항목 가운데 199개에 대한 관련 특허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가 꼭 들어맞는 기술은 아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을 들이면 혹시 모를 수출규제 위협이 닥쳐와도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출연연은 사태 촉발 주요 원인이 된 반도체 핵심 소재 과제도 꾸준히 해 왔다. 지난 5년 동안 ETRI, 생기원, 화학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이 해온 연구는 총 37개, 전체 연구비는 744억1300만원에 달한다.
◇주요 출연연, 속속 기술독립 방안 마련
출연연은 기술독립군으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대응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ETRI, 기계연과 재료연, 화학연을 비롯한 핵심 분야 연구기관이 현재진행형으로 다양한 R&D 방향, 기업 지원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반도체 분야와 밀접한 ETRI는 반도체 소재 타깃 기술 관련 3개 과제를 집중 기획하고 있다. 포토레지스트 관련 소재인 고해상도 OLED 디스플레이 컬러화 소재, 세라믹 코팅 분리막용 수계 바인더 국산화 및 실증, 흑연계 음극 바인더 국산화 및 셀 공정 검증이 기획 과제다. 또 정보통신기술(ICT) 전 분야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13개 과제도 구체화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공작기계 분야 수출 규제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주목 받은 기계연은 관련 국산화 R&D와 기업 지원 교두보 역할을 할 '공급기지형 R&D 센터'를 설치·운영할 계획이다. 기계 분야 고난도 공통 부품을 개발하고, 이를 기업에 전달하는 업무까지 맡게 한다. 제조장비 두뇌 역할을 하는 '수치제어장치(CNC)'를 먼저 국산화한다.
일본 수출규제 사태 초기부터 주목받은 재료연은 곧 '고순도 니켈 분말' 상용화 연구를 시작할 계획이다. 고순도 니켈 분말은 '적층형 세라믹 콘덴서'에 쓰이는 핵심 소재로 일본 수출규제 예상 품목 가운데 하나다.
재료연은 이밖에 이미 기초기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철강, 비철 분야 소재 상용화도 추가로 검토하고 있다. 향후 피해가 예상되는 소재 현황 조사에도 힘쓰고 있으며, 11개 기관이 모인 '소재 분야 연구기관협의회' 간사기관으로서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화학연도 중장기 화학소재 분야 연구전략과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 있다.
◇NST, 큰 틀 전략 마련…R&R 반영도
출연연 전체 차원에서의 전략 마련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중순에는 NST가 일본 수출규제 관련 '국가 R&D 경쟁력 강화 대응전략'을 큰 틀에서 마련해 발표했다. 향후 전략기술 확보에서부터 실증 지원, 연구생태계 개선 및 기업 지원까지 전 부분을 아우른다.
각 방안은 △소재·부품·장비산업 기술지원단 운영 △실증 테스트베드 및 시뮬레이션 총괄지원 △미래전략기술 탐색 및 확보 △미래선도형 연구생태계 정착 등이다.
특히 미래전략기술 탐색 및 확보 분야를 위해서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국회미래연구원을 비롯한 국내외 싱크탱크 그룹과 협업하고, 산하 출연연 기관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R&D 기획을 진행할 계획이다. NST 융합연구를 통해 도출 기획이 조기에 실현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NST는 앞으로도 대응 전략을 더욱 보완할 방침이다. 또 올해 구체화한 출연연 '역할과 책임(R&R)'에도 이들 내용을 담을 계획이다. 각 출연연이 수행할 임무와 역할을 망라한 R&R에 다양한 기술 국산화 내용을 가미, 출연연 기술독립군화를 앞당길 계획이다.
NST는 글로벌 무역 전쟁이라는 위기를 촉발시킨 이번 사태가 전체 출연연에 더 큰 발전을 가져올 것으로 보고 있다. R&D 및 지원 체계를 정비하고 발전시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와 기업이 보다 성장시키겠다는 설명이다.
원광연 NST 이사장은 “장기 관점에서 원천기술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기보유 기술과 앞으로 구현할 것을 많은 기업에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출연연이 우리나라 산업을 지키는 기술자립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와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표> 일본 전략물자 무역제재 관련 주요 출연연 대응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