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 이후 반도체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 기술 독립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바로 '테스트베드'다. 테스트베드는 새로운 기술·제품·서비스의 성능 및 효과를 시험할 수 있는 환경 혹은 시스템, 설비를 일컫는다. 열악한 우리나라 중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마음놓고 실험할 환경을 조성해 달라는 주장이 곳곳에서 나온다. 이미 우리 정부는 나노팹 등을 통해 10곳 이상 반도체 공공 연구개발(R&D) 인프라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 꾸준하지 못했던 지원이 중소기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지금부터라도 지속 지원으로 모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일본 수출 규제로 국내 열악한 반도체 생태계 민낯이 오롯이 드러났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현재 가장 주력으로 사용하는 불화아르곤(ArF) 포토레지스트 수급마저 막혔다면 반도체 공정이 '올스톱'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거라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에 업계는 테스트베드에 주목했다. 연구용으로 쓸 EUV 노광 장비는 1500억원이 넘을 정도로 값이 비싸다. 중소 업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정부가 나서 육성하지 않으면 소재 생태계가 확장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제품을 개발하고 싶어도 마땅히 실험할 수 있는 곳이 없는 업체들은 해외로 향한다. 이준혁 동진쎄미켐 부회장은 지난 5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국내에서는 마땅히 제품 R&D 실험을 할 곳이 없어 벨기에 IMEC에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IMEC에서 실험 절차도 만만치 않다. 업계에 따르면 벨기에 최대 반도체 R&D 허브 IMEC은 1년에 8시간씩, 단 4회 실험 기회만 주어지는 데도 10억원이 들 만큼 큰 비용과 시간이 든다.
업계 관계자는 “선진 소재 기업들은 실험 횟수가 적어도 노하우가 있어 기술 축적이 수월하다고 쳐도, 우리나라 업체들은 일주일 내내 실험을 해도 따라잡기 힘든데 실험마저 어려우니 난감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생태계 마련을 위한 대기업 지원이 미비했던 점도 지적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아직 국내 소재 회사 수준이 칩 제조업체 수준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는데 사업에 한창인 대기업이 모든 것을 지원할 인력과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10개 이상 공공 반도체 연구 인프라가 있다. 그러나 꾸준하지 못했던 정부 지원 등으로 기업들이 첨단 소재를 개발하기에 무리가 있을 만큼 노후한 공정이라는 평가다.
일본 수출 규제 이후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집행과 국산화 움직임으로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에 새로운 연구 인프라가 들어서고 있다. 12인치 웨이퍼로 전공정 소재를 개발할 수 있는 시설이다. 이번 추경예산에서 배정된 금액을 합쳐서 450억원이 투입된다. ArF 노광 장비, 식각, 증착 장비 등 구축을 추진 중이다. 2021년 4월 가동 예정이다. 업계의 기대는 크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타격했던 EUV 포토레지스트 연구 장비는 아니지만 일단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 수 있도록 모든 관계자들이 꾸준히 힘을 모아야 한다”고 전했다.
지금 규모는 작지만 지속적인 연구 설비 지원이 이어지면 대기업 등 민간도 이 테스트베드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 국가 연구기관인 뉴욕주립대(SUNY) 폴리테크닉 연구원(Polytechnic Institute)에 투자한 미국 반도체 장비 1위 업체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대표 사례다. SUNY 폴리테크닉 연구원은 12인치 웨이퍼 EUV 노광 연구 설비는 물론 에칭, 증착, 이온 주입 등 다양한 반도체 연구 설비를 갖춘 곳이다.
2016년 SUNY 창립자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2016년 이후 큰 지원이 끊긴 상황이었지만 지난해 11월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가 7년간 8억8000만달러(1조1000억원)를 투자해 이 곳에 새로운 연구소 'META 센터'를 세운다고 밝혔다. 연구 인력 고용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늘어나는 소재와 장비 수요에 고민하고 있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측이 연구 설비를 잘 갖춘 공공 인프라와 '윈-윈'을 기대하고 투자한 것이라고 봤다.
업계 관계자는 “테스트베드 민관 협력이 가장 잘 구현된 모델”이라면서 “우리나라도 기업에 전적으로 기대기보다 기업이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도록 꾸준하게 인프라 설비를 갖춰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