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용석 법무법인 케이씨엘 변호사
애플(Apple)의 혁신적인 디자인과 감성을 대중에게 전달한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폰트에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애플(Apple) 폰트라고도 불리는 미리아드(Myriad) 폰트는 애플의 간결한 감성을 대표합니다.
인터넷 상에서 “나 지금 궁서체다”와 같은 위트 있는 문장으로 글쓴이의 진지함을 표현한 것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말’과 달리 정보 전달자의 목소리, 톤, 뉘앙스를 알 수 없는 ‘글’에 있어 폰트는 글자의 모양이라는 기능 외에 정보 전달자의 기분, 감정, 아이텐티티 등을 표현하는 부가적인 기능도 수행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텍스트가 PC, 스마트폰 등 디지털 방식으로 표시된 것이므로 폰트파일의 역할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폰트는 저작물로 인정되어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폰트와 관련된 용어를 정의하면, ‘폰트’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진 형태로 만들어진 한 벌의 글자꼴‘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서체‘, ’서체도안‘, ’글자체‘, ’typeface‘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폰트’를 컴퓨터프로그램 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폰트파일’, ‘서체파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대법원은 ‘서체도안’과 ‘서체파일’을 구분하여 달리 취급합니다.
즉, ‘서체도안’은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인 저작물에 해당하지 않지만, ‘서체파일’은 컴퓨터프로그램저작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대상이 된다는 입장입니다.
여기서, ‘서체파일’이 컴퓨터프로그램저작물로 인정된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창작물이 전제적으로 보아 저작물로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저작물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에 대해 저작권이 미치는 것은 아니며, 저작물 중 창작성이 있는 부분에만 저작권이 미칩니다.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실질적 유사성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저작물 중 창작성이 있는 부분에 중점을 두어 대비합니다.
그렇다면 ‘서체파일’ 중 창작성이 있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서체도안’을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서체파일’도 저작물로 인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서체파일’의 통상적인 제작 과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1. ‘서체도안’(원도)을 준비합니다.
2. 폰토그라퍼(fontographer)와 같은 서체파일 제작 프로그램에서 ‘서체도안’(원도)를 읽어 들입니다.
3. 이를 통해, 해당 ‘서체도안’(원도)의 대략적인 윤곽선 정보를 추출합니다.
4. 그런데, 이 윤곽선 정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서체파일’ 제작자가 마우스를 이용하여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을 하여 ‘서체파일’을 만듭니다.
우리 대법원은 ‘서체파일’ 중 ‘서체도안에 대한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 부분’에 대해 창작성을 인정하였습니다. 해당 대법원 판시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서체파일 제작용 프로그램인 폰토그라퍼(fontographer)에서 윤곽선 추출기능을 통해 자동으로 추출된 윤곽선은 본래의 서체 원도와는 일치하지 않는 불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다시 마우스를 사용하여 윤곽선을 수정하여야 하고,
또한 폰토그라퍼에서 하나의 글자를 제작하기 위한 서체 제작용 창의 좌표는 가로축 1,000, 세로축 1,000의 좌표로 세분되어 있어, 동일한 모양의 글자라 하더라도 윤곽선의 각 제어점들의 구체적 좌표값이 위와 같은 수정 부분에 있어서도 일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지므로,
서체파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글자의 윤곽선을 수정하거나 제작하기 위한 제어점들의 좌표값과 그 지시·명령어를 선택하는 것에는 서체파일 제작자의 정신적 노력의 산물인 창의적 개성이 표현되어 있다고 봄이 상당하고,
따라서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을 한 부분의 서체파일은 프로그램저작물로서의 창작성이 인정된다.”
이에 따라 ‘서체파일’의 저작권 침해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이렇게 창작성이 인정되는 부분, 즉 ‘서체도안에 대한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 부분’을 무단이용한 것인지를 따져보게 됩니다.
대법원의 이러한 입장은 ‘서체도안’ 자체를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과도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대법원의 입장을 일상에서 흔히 발생하는 상황에 적용해보면,
(1) 타인의 ‘서체도안’을 보고 따라 그리는 방법으로 동일 또는 유사한 ‘서체도안’을 작성한 경우 저작권 침해에 해당할까요?
-서체도안은 저작물성이 없으므로,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2) 타인의 ‘서체도안’을 보고 그 모양에 해당하는 ‘서체파일’을 제작한 경우 저작권 침해에 해당할까요?
-‘서체파일’ 중 창작성이 인정되는 부분은 ‘서체도안에 대한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 부분’입니다. 그런데,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작업’을 스스로 하여 ‘서체파일’을 제작하였으므로,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3)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간판, 표지판, 홍보물 등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미칠까요?
-언뜻 생각하면,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에는 서체파일의 창작성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서체파일’ 중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범위는 ‘서체도안에 대한 윤곽선의 수정 내지 제작 작업을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대법원이 ‘서체파일’의 창작성을 인정한 근거는 폰트그라퍼에서 하나의 글자를 제작하기 위한 서체 제작용 창의 좌표가 가로축 1,000, 세로축 1,000의 좌표로 세분되어 있어서 동일한 모양의 글자라 하더라도 윤곽선의 각 제어점들의 구체적 좌표값이 일치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좌표값의 차이는 서체파일, 즉 .ttf 파일과 같은 폰트파일 간의 실질적 유사성을 판단할 때에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에서는 의미가 없는 수치입니다. 따라서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에는 서체파일의 저작권이 미치지 않습니다.
-사실상 ‘서체파일’ 자체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고, 하급심 판례들도 이와 같은 입장입니다.
(4) A라는 업체가 B라는 업체에게 간판, 표지판, 홍보물 등의 제작을 의뢰하였는데, 외주업체인 B가 불법 서체파일을 무단이용하여 간판 등을 만들어 A에게 납품한 경우는 어떨까요?
-B업체가 저작권 침해인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A업체는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을 이용하더라도,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A업체는 저작권이 미치지 않는 ‘서체파일을 이용하여 만든 결과물’만을 이용하였을 뿐, ‘서체파일’ 자체를 이용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언하면, ‘서체파일’과 관련하여 저작권 침해 경고장을 받아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경고장을 보내오는 업체들도 있지만, 법무법인 명의로 된 경고장을 받으면 마음이 위축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논리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퉈볼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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