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의 발칙한 커뮤니케이션2]CEO 코드<15>이건희 회장-반도체, 너는 내 운명

'삼성 상회'는 2차 세계대전 후 고철을 모아 수출하고 설탕, 비료를 수입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 옷 만드는 방직업은 더욱 번창했다. 그렇게 번 돈을 막대한 기술과 설비가 들어가는 반도체 사업에 쏟는다? 생산라인 한 개 만드는데 수십억이 든다는데. 판단 오류다.

삼성전자는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할 여력이 없었다. 1973년 오일 파동을 겪은 이후였다. 자금도 기술도 없는 판국에 빚더미뿐인 한국반도체 인수라니. 같이 죽자는 얘기다. 인수를 지시한 사람은 동양방송 이사 이건희였다. 모험이 아닌 운명을 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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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부친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눈을 뜨도록 전략을 짰다. 설탕, 밀가루가 미래 먹거리가 아니라는 걸 눈으로 보여줬다. 1982년 이병철 회장의 보스턴대 명예 경제학 박사 학위 수여식에 동행했다. 여기서 부친과 IBM, GE, 휴렛팩커드 등 반도체 생산라인을 참관했다. 이건희 회장이 왜 개인 돈으로라도 반도체 회사를 꾸리고 싶어 했는지 부친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 우린 너무 늦었다.'

삼성전자는 1994년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쾌거였다. 더구나 반도체 메모리 최강자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최고'임을 입증했다. 사업 초기 부품 대부분을 일본에서 가져 오며 온갖 수모를 견뎌야 했다. 일본 업체들은 거만했다. 시세보다 비싼 가격을 제시했다. 때로는 부품이 없어서 못 주겠다고 외면했다.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횡포 뒤엔 차디찬 조롱이 있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해내겠어?” 미국, 일본과 기술 격차는 10년 이상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경영 핵심 역량은 '통찰력'과 '용단'이다. 대한민국은 쇠 젓가락으로 쌀알을 집는 민족이다. 미세함의 집합체인 반도체 DNA를 타고 났다는 통찰력이 적중했다. 좁은 땅 덩어리에 부존자원도 거의 없다. 글로벌 기업으로 생존하기 위한 용단을 내렸다. 인재 양성이다.

기술 집약 산업인 반도체에 필요한 요소는 인재다. 언제까지나 일본에, 미국에 머리 조아리고 기술자를 데려올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극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소수 인재가 미래 산업의 승패를 가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부지런히 인재를 모았다. 회장 취임 후 “뛰어난 인재에게는 나보다 월급을 많이 줘도 좋다”고 당부했다. 각 사업을 맡은 CEO들을 세계 명문대학 채용박람회에 내보냈다. 목적은 헤드헌팅이었다. 글로벌 인재 '삼성 장학생'은 이렇게 생겨났다. 이 회장은 단기성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믿고 기다리며 지원했다. 진대제, 황창규, 이기태, 최지성, 윤부근 등 스타급 전문 경영인이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니다.

이건희 회장은 “구멍가게 같은 공장에서 개인 사업으로 시작한 반도체가 10년 만에 삼성의 핵심 사업이 됐다”고 회고했다. 포천은 2002년에 “삼성전자는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전자레인지 같은 제품을 생산해 미국시장에 뛰어들어 지금도 헐값에 파는 값싼 브랜드”라고 어설픈 질투로 혹평했다. 구멍가게에서 만든 반도체가 일본을 따돌리고, 미국 거대 기업의 애간장을 태웠다. 관록 있는 경제지의 논평이 꼴불견이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에 운명을 걸었다. 삼성이 반도체고 반도체가 삼성이 됐다. 세계는 삼성을 모방하고 추격한다. 국제 사회 경제 현실엔 간이역이 없다. 살아남을 것이냐, 사라질 것이냐, 숨이 가쁘다. 삼성은 지금 모험이 아닌 운명을 걸 때다. 이건희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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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인터랙티브 콘텐츠학 박사 sarahs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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