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의료기기 해외진출이 확대되고 있지만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선진국 규제가 강화되고 기업 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탄탄한 내수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습니다.”
국내 의료기기 산업에 장밋빛 전망이 가득한데 찬물을 끼얹는다. 장교 출신답게 선이 굵은 목소리로 내뱉는 주장은 마냥 쓴 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박희병 한국의료기기공업협동조합(KMDICA) 전무이사는 최근 국내 의료기기 산업 고공 성장에도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에서 생체전기공학을 전공하고, 군대에서 의무장비 정비장교로 13년 간 근무 후 소령으로 예편했다. 대학병원에서 원무과장 등 행정업무 경험을 쌓은 후 2005년부터 600개가 넘는 국산 의료기기 제조사 단체 의료기기협동조합에 몸을 담고 있다.
국산 의료기기 기업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는 취약한 내수가 국내 산업 성장을 제한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의료기기 규제가 강화되고, 기업 간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내수시장에서 크지 못한 국산 기업은 해외에서도 큰 힘을 내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박 전무는 “유럽 시장은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 50%가 넘는데, 그동안 지침 수준이던 많은 규정이 규제로 의무화되면서 수출이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면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도 치열해져 R&D 강화가 필수지만, 외산제품이 장악한 국내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동력(자금)을 확보할 내수는 너무나 빈약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 규모는 36억 달러(약 4조2354억원)로, 전년대비 14.1%나 증가했다. 최근 5년간 평균 성장률은 8.8%에 이른다. 이에 반해 내수시장은 초라하다. 여전히 의료기기 산업은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한데다 대형병원에서 국산 제품 사용률은 10%가 안된다. 외산 제품이 장악한 내수시장에서 국산기업은 설자리를 잃는다. 혁신적 아이디어로 해외에서 승부를 보려하지만 '자국시장에서도 안 써주는 제품'으로 낙인찍힌다.
수출 실적 역시 단순히 금액만 봐서는 안된다. 숫자 속에 감춰진 배경을 이해하면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 취약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게 박 전무 주장이다.
그는 “정부 지원과 기업 노력으로 국산 의료기기 수출이 늘어난 것은 맞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마냥 기뻐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면서 “우리나라 의료기기 수출액은 GE나 지멘스 등 국내에 생산시설이 있는 외국계 기업이 본국으로 수출한 금액이 상당수 포함된 데다 기존에 의약품으로 분류됐던 체외진단기기가 의료기기로 편입된 영향도 크다”고 지적했다.
글로벌 시대에 내수시장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일지 모른다. 몇몇 스타트업, 벤처는 좁은 내수를 건너뛰고 글로벌 기업과 정면 대결하겠다고 호기롭게 해외시장 문을 두드린다. 그럼에도 박 전무는 탄탄한 내수가 뒷받침되지 않은 산업은 모래 위 누각처럼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국산 의료기기 수준도 놀라울 정도로 향상돼 단순히 국수주의적 시각에서 국산 제품을 써달라는 것이 아니다”면서 “국산, 외산을 떠나 질 좋은 제품을 써달라는 게 국산 의료기기 기업 주장인데, 외산이 장악했던 병원 문턱은 여전히 높다”고 말했다. 이어 “좁은 내수를 넘어 해외로 가는 게 맞는 방향이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견딜 체력은 내수에서 확보한 자금과 경험”이라면서 “국공립병원이라도 나서서 적극적으로 국산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용철 의료/바이오 전문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