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지방 공공기관이 전용회선 임대 사업을 발주했다. 사업 규모나 방식, 장비 모두 3년 전과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사업 예정가격(예가)은 3년 전 발주 가격의 70%에 불과했다. 3년 전 사업 낙찰률을 근거로 예가를 산정했기 때문이다.
과거 낙찰률을 근거 데이터로 활용하면 사업이 진행될수록 낙찰가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낙찰률이 70%라면 100원짜리 사업 낙찰가는 70원, 다음 번 사업에선 49원으로 떨어진다.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같은 폐단은 공공기관 입찰에서 흔한 일이다. 예산 절감 때문이다. 산업 생태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행위지만 마땅한 규제 수단이 없다.
정보통신기술(ICT) 사업의 불합리한 입찰 관행은 이뿐만이 아니다. 가격 하한선이 없는 2단계 최저가 입찰 확산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2단계 최저가 입찰은 기능이 단순하고 보편화된 제품을 구매할 때 적용된다. 입찰 기간을 단순화하고, 예산을 줄일 수 있다. 1단계에서 일정 기준을 통과한 업체 가운데 2단계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적어 낸 곳이 승자가 된다. '0'원을 적어 내도 감점은 없기 때문에 출혈 경쟁이 불가피하다.
지난해 서울교통공사가 지하철 1~4호선, 7~8호선 멀티프로토콜라벨스위칭(MPLS) 장비를 구매하며 2단계 최저가를 사용했다. 낙찰률은 50% 안팎이다. 서울교통공사는 유선망인 철도통합망(LTE-R) 일부 사업에도 2단계 최저가를 적용, 업계 비난이 비등했다. MPLS와 LTE-R 사업은 단순한 장비 도입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통신 사업의 '60% 가격 하한선'도 업계를 힘들게 하는 제도다. 80% 이하 가격을 제시하면 감점을 받는 소프트웨어(SW) 사업과 달리 정통 사업은 가격을 60%까지 낮춰도 감점이 없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는 가격 하한선이 70% 이상은 돼야 적자를 면할 수 있다고 하소연하지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우선협상 과정이나 최종 계약 이후 주요 장비를 바꿔치기하거나 사업 내용을 바꾸는 사례도 근절해야 한다. 입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장비를 바꾸는 것은 엄연한 불공정 행위다. 입찰 제도 근간을 흔들 수 있다. 장비를 바꾼다면 재입찰을 하든지 사업 예산을 조정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불합리한 입찰 관행과 제도 피해가 대부분 중소기업에 미친다는 점이다. 컨소시엄을 이끄는 대기업은 어떤 경우에도 일정 수준의 마진을 남긴다. 수익 하락은 오롯이 중소기업 몫이다.
과거 낙찰률로 신규 사업 예가를 산정하는 폐단은 물가 상승률 등을 반영해 보정하는 제도로 방지해야 한다.
2단계 최저가 입찰 확산을 막으려면 국가계약법 개정이 필요하다. 지식 기반 사업의 범위를 명확히 해서 '협상에 의한 계약' 적용을 의무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보통신 사업의 60% 가격 하한선 역시 SW 사업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ICT 융합 시대다. 과거 사고방식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은 국민을 위해서 일한다. 단순한 사업 예산 절감과 중소기업을 비롯한 산업 발전 지원 둘 가운데 어느 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해야 한다.
안호천 통신방송 전문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