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에너지저장장치(ESS) 생태계가 멈춰 섰다. 작년 5월부터 이어진 화재사고 원인조사가 올해 들어 본격화되면서 전면 가동 중단된 사업장이 적지 않다. 국내에 설치된 약 1500개 ESS 사업장 3분의 1은 가동이 멈췄다. 기존에 진행되던 프로젝트는 올스톱 상태다. 신규 발주도 씨가 말랐다. 이런 와중에 업계 피해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매달 피해액은 300억원으로 추산된다. 더 큰 문제는 사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국내 ESS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화재 사고 이후 1년여간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국내 ESS 산업 생태계를 긴급 점검했다.
“정부 발표가 늦어지면서 희망 고문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아사(餓死)' 직전입니다. 언제까지 발표하겠다는 시간표를 제시해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올해는 아예 사업이 어려울 것 같다'라는 말이라도 해주면 다른 사업이라도 찾을 것 아닙니까. 생태계 전체를 불안에 떨게 만들어놓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국내 PCS업체 A사 관계자)
“정부가 태양광 ESS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가중치를 최대로 주면서 산업을 육성시켰습니다. 성장성을 보고 많은 업체가 뛰어들었습니다. 투자도 많이 했고요. 저희도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보려 60억원 정도를 투자했는데 올해 사업이 '올스톱' 됐습니다. 회사 망하라는 이야기 밖에 더 됩니까?” (국내 EPC업체 B사 대표)
국내 ESS 관련 업체 관계자들은 울분을 쏟아냈다. 지난해 잇따른 ESS 화재로 생태계 전체가 멈추고 사업 재개 시점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정부는 올해 초 다중이용시설에 설치된 ESS 345개소에 대한 가동을 전격 중단했다. 이어 LG화학이 자사 배터리를 탑재한 ESS 389개소에 대해 가동 중단을 요청했다. 이에 따른 직접 피해 규모만 매월 3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업체 대부분이 미리 투자를 진행하고 ESS를 가동하면서 전기요금 절감 금액을 받아 운영자금을 충당하고 대출금을 상환하는 구조인데 돈이 돌지 않다보니 유동성에 심각한 위기가 생긴 상황이다.
그나마 가동 중단으로 인한 피해는 보상이 약속돼 있기 때문에 상황이 낫다. 하지만 신규 발주 중단으로 인한 기회 손실은 추산하기도 어렵다. 업계에선 사업이 언제 재개될지 불확실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했다. 업계 전체가 정부 '입'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다.
한 시공사 관계자는 “계획대로라면 올해 초에 이미 준공이 돼야했던 프로젝트인데 작년 말부터 공사가 중단돼 방치되면서 잔금을 못 받고 있다”면서 “고객사들도 정부 방침이 나올 때까지 아무 결정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약속했던 신규 프로젝트 발주가 모두 보류돼 매출이 제로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보험금은 화재 이전보다 3~4배 올랐다. 그마저 가입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ESS 자체가 위험한 사업으로 인식되면서 은행권 대출도 어렵다. 투자자 발길도 끊겼다.
에너지 업계도 ESS 화재사고로 인한 사업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ESS 가동 중지에 따른 막대한 손실을 떠안아야 하는 부담은 물론, 신사업 진출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한 목소리다.
발전 공기업 고위 관계자는 “ESS 화재 사고에 대한 결과 발표와 대책 마련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신규사업 진출이 올스톱 돼 있다”며 “신규 특수목적법인(SPC) 설립에도 제동이 걸려 현재는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업계는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를 주문했다.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루빨리 사업이 정상화 될 수 있도록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꼽고 있다. 매년 ESS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올해도 매출 규모가 5~10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대부분 기업이 고용 규모를 늘리고 재고를 축적하는 등 투자 규모를 늘린 상황에서 사업 재개가 이뤄져야 운영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 EPC업체 대표는 “정부가 신재생에너지와 ESS 산업을 계속 육성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런 저런 검토가 더 필요하지만 언제까지 대책을 마련해보겠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진정성 있는 자세로 소통했다면 이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을 것 같다”면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화재 사고를 계기로 더 안전한 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정현정 배터리/부품 전문기자 iam@etnews.com, 최재필기자 jpcho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