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말모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말모이는 '우리나라 최초로 편찬하려 했던 현대적 표준어 사전 원고' 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일제 수탈을 피해 우리말을 목숨 걸고 지킨다. 언어는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담은 유산이자 세계를 표현하는 소통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도 표준어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된 언어가 있을까. 이 세상은 과연 무엇으로 이뤄져 있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앞다퉈 답을 내놨다. 탈레스는 물이라고 주장했고, 엠페도클레스와 플라톤 등은 물, 불, 흙, 공기라고 주장했다. 이런 물질 근원적 요소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가 계속되어 지금의 '화학'이라는 학문이 생겼다.
약 138억년 전 빅뱅을 통해 우주가 탄생하면서 수소가 만들어진 이후 핵융합반응이 진행돼 지금의 118개 원소가 생성됐다. 이 중 자연에 존재하는 원소는 약 90종류고, 나머지는 입자가속기를 통해 인공으로 만들어진 원소다. 이 118개 원소를 비슷한 특징과 규칙에 따라 분류한 것이 원소 주기율표다. 지금도 세계 많은 과학자들은 새로운 원소를 만들기 위해 국가 차원 경쟁을 하고 있다.
주기율표를 제안한 과학자는 많이 있었지만 현대 주기율표 개념을 제대로 정리한 사람은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다. 멘델레예프는 당시까지 발견된 원소를 가벼운 원소부터 차례로 배열해 본 결과 주기적으로 성질이 비슷한 원소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원소를 존재와 성질까지 예측해서 화학을 예측 가능한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올해는 멘델레예프가 1869년 주기율표를 만든 지 150주년이 되는 해로, UN이 지정한 '주기율표의 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주기율표에 있는 원소로 이뤄져 있다. 도시의 밤을 빛내는 조명은 네온, 아르곤, 제논 원소로 돼있다. 우리 먹거리를 책임지는 비료에는 질소와 인 원소가 있다. 아플 때 먹는 약은 탄소에 기반한 화합물로 이뤄져 있다. 눈 수술에 쓰이는 레이저는 크립톤 원소를 활용한다.
또 많은 일상 속 제품은 주기율표 속 원소의 화학적 특성과 화학 반응을 활용해 개발됐다. 일례로 스마트폰은 주기율표 원소와 화학기술의 집약체다. 반도체는 13-16족 준금속 원소, 특히 14번 규소(Si)를 활용해 개발됐다. 평판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유리기판 또한 규소로 이뤄져 있다. 최근 폴더블 스마트폰과 관련돼 주목을 받고 있는 폴리이미드 필름은 유리처럼 표면이 단단하면서도 구부릴 수 있는 특성을 가진 핵심 소재로 1족 수소(H), 14족 탄소(C), 15족 질소(N), 16족 산소(O)로 구성돼 있다. 배터리는 주로 리튬(Li) 원소의 이온화 또는 금속화로 충전, 방전된다. 이렇게 원소와 화학기술로 이뤄진 물건이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바꾸고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어릴 때 수학을 배우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구구단 암기였다. 어쩌면 과학 특히, 화학을 배우기 위해 제일 먼저 하는 주기율표 암기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다만 복잡해 보이는 주기율표를 암기하려고 하다 보니 어렵고 험난한 길을 걸었던 게 아닌가 싶다. 주기율표는 과학, 특히 화학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 언어인 것이고, 언어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습득하는 것이다.
주기율표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교양 언어일 수도 있다. 만약 색다른 언어를 배워보고 싶은 계획이 있다면 과학의 언어 '원소 주기율표' 탐구에 한번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어렵게 느껴진다면 올해 주기율표의 해를 맞아 한국화학연구원을 비롯해 다양한 기관에서 준비하는 주기율표 원소 관련 행사와 콘텐츠를 접해보자. 이미 옆에 있었지만 소중함을 눈치채지 못했던 주기율표와 화학이 조금은 쉽고 재미있게 내 생활 속으로 다가올 것이다.
김성수 한국화학연구원장 sungsuk@kric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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