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년 창간기획 Ⅲ]<3>수직에서 수평문화로 변화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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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1997년 8월 괌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추락했다. 조종사는 비행경력 9000시간에 달하는 베테랑이었다. 여객기는 폭우가 내리는 새벽, 괌 공항에서 약 4㎞ 떨어진 니미츠 힐에 충돌했고 탑승자 254명 가운데 228명이 사망했다. 훗날 '아웃라이어' 저자 말콤 글래드웰은 조종실 내 소통이 자유로웠다면 이 같은 참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아시아 수직적 위계질서 문화가 빚은 참사”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출간된 하버드비즈니스리뷰 3~4월호에서는 '최고경영자 거품(CEO Bubble)'이라는 용어를 다뤘다. 최고의사결정권자를 둘러싼 참모진이 잘못된 판단에 직언하지 않고 찬성만 하면 최고의사결정권자는 도그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수직적이고 경직된 조직 문화가 이 같은 현상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최고경영자 거품에 빠진 조직에서는 최고의사결정권자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더라도 제동을 걸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진다. 최고의사결정권자에 직언하지 못하는 조직이 맞는 비참한 결과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반복됐다.

기업 조직 문화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꾸자고 제안하는 이유다. 수직적 조직 문화는 경제발전시기 한국의 급속한 발전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상층부 지시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하는 수직적 기업 문화는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에 적합한 방식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다품종 소량생산, 창의적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글로벌 기업으로 떠오른 아마존, 구글이 대표 주자다. 신흥 글로벌 기업이 수직 문화를 바탕으로 소통하는 환경을 조성하면서 수직 조직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고 있다. 이에 발맞춰 경제 성장기에서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국내 대기업과 중견기업에서도 생소한 수평문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삼성전자는 2016년 3월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사고방식, 관행을 과감히 떨쳐내고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의식과 일하는 문화를 혁신한다는 취지에서 '스타트업(Start Up) 삼성 컬처혁신'을 발표했다. 열린 소통 문화를 조직 내부에 이식하는 것이 골자다. 임직원 간 공통 호칭은 '님'으로 통일했다. 부서 내 업무 성격에 따라 '님' '프로' '선후배님'으로 유연성을 부여했다. 불필요한 특근을 없애면서 조직문화 개선에 돌입했다.

LG전자는 사업본부별 오픈컴 행사를 주기적으로 개최한다. 소속 조직 구성원이 경영진에게 질의 응답하는 방식이다. CEO는 현장 방문 때 현장 직원 의견을 청취하는 '공감 간담회'를 연다. CTO부문에서는 올해부터 월 1~2회 소속 구성원이 모두 참여하는 올핸즈미팅(All-Hands Meeting)을 한다.

대홍기획과 코웨이는 지난해 10월부터 직급과 직책에 상관없이 각각 '쌤' '님'으로 부르는 문화를 도입했다. 제일기획은 전문가라는 의미를 담은 '프로'로 상호 간 호칭을 통일했다.

일본계 기업인 소니코리아도 수평문화 정착에 나선 지 오래다. 일본계 기업은 보수적이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소니코리아는 일찌감치 복장 자유화와 보고·결재라인을 간소화했다. 이를 토대로 실무진과 조직 상층부 사이 소통 기회와 폭을 넓혔다. 효율적 업무 처리를 위해서는 자유로운 조직 문화 정착이 필수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조직 내 수직문화 폐해가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물리적 시스템 변화만으로는 수평문화 정착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권위주의, 소통 부족, 일방적 지시처럼 뿌리 깊은 수직적 조직 문화를 고치는 데에는 조직 고위층부터 실무진까지 사고 변화가 필수다.

박찬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제도혁신연구단장은 “직급 상관없이 구성원 전문성을 인정하고 발언권과 보상이 보장되는 풍토를 정착하는 것이 시급하다”면서 “현재 경직된 조직 문화에서는 수평적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전문가는 시스템 정착과 더불어 사회 의식 변화도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수직적 조직 문화가 갖고 있는 강점도 분명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드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는 분석이다.

곽수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글로벌 기업을 무작정 따라하는 것 보다는 한국에 맞는 수평문화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현재처럼 조직 내 직급이 너무 다양하면 하나의 계급사회가 된다. 조직 직급을 간소화하는 방향으로 수평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민화 KAIST 교수는 “수평문화를 구축하는 목적은 혁신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계층구조 단순화와 상호평가를 실시하는 것이 수평문화 첫걸음”이라면서 “조직에서는 조직원 실패를 적극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수평문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호기자 youngtiger@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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