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시장 인프라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국내 증시 부진으로 해외 주식 거래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대다수 증권사가 후선 업무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외 주식 거래 시장 확대에 따라 사업 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IT 시스템 안정성은 단순 비용으로 인식, 투자를 소홀히 한 결과다. 삼성증권 유령주식 사태에 더해 증권사 전반의 해외 주식 착오 거래까지 드러나면서 자본 시장에 대한 불신이 불에 기름 부은 듯 번지고 있다.
15일 금융감독원,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중소형 증권사 대다수가 해외 주식 거래에 따르는 각종 권리 배정 업무를 수작업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KB증권 등 일부 대형 증권사만이 해외 주식 후선 업무를 자동화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최근 이어진 자본 시장의 각종 사고 원인을 IT 인프라 투자 없이 신규 고객 유치에만 급급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해외 주식 결제 금액은 179억5000만달러로 지난해 하반기 134억달러 대비 34% 증가했다. 6개월 만에 약 5조원 넘는 돈이 해외 주식에 몰렸다.
이처럼 해외 주식에 투자자 수요가 몰리자 대형사뿐만 아니라 중소형사까지도 속속 해외 주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문제는 해외 주식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중소형사 대부분이 해외 주식 거래 처리를 위한 후선 업무 기본 인프라를 갖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은 투자자에게 실물증권을 인도하는 대신 예탁원을 통해 계좌 대체 입·출고된다. 예탁원을 통해 양도와 질권 설정 등 각종 권리 이전 절차는 후선에서 벌어진다.
대부분 증권사가 국내 주식 거래에는 이런 후선 업무를 예탁원과 연결된 전용선을 통해 처리한다. 그러나 해외 주식 후선 업무는 여전히 수작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중소형 증권사 관계자는 “다양한 해외 주식을 취급하지 않는 데다 대형사에 비해서는 수요가 많지 않다 보니 CCF(자동 송·수신 시스템) 방식 전환에 필요한 서버 증설과 시스템 구축 등 별도 IT 비용을 투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면서 “유진투자증권과 같은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문제가 불거진 유진투자증권 해외 주식 착오 매매 사고는 권리 배정 업무 수작업에 따른 실수가 원인이다. 유진투자증권은 5월 말 이뤄진 미국 상장지수펀드(ETF)의 병합 사실을 제때 계좌에 반영하지 못했다.
주식 병합으로 투자자 A씨가 실제 보유한 665주는 166주로 줄었지만 계좌에는 주식 수가 그대로인 채 주식 가격만 4배 뛰었다. 결국 삼성증권 사례와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지만 계좌상으로만 존재하는 주식을 매도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금감원도 유진투자증권을 비롯해 해외 주식 예탁자계좌부를 운영하고 있는 예탁원 대상으로 실태 파악을 위한 현장 검사에 들어갔다. 금감원 관계자는 “삼성증권 배당 사고에 따른 내부 통제 점검을 실시하는 과정에서도 해외 주식 거래 실태를 들여다볼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서 “해외 주식 거래도 국내 거래와 마찬가지 내부 통제를 갖출 수 있도록 할 지 여부는 경위 파악 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 안팎에서는 자본 시장의 부실한 후선 업무 시스템 전반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에 앞서 금감원이 모든 증권사 대상으로 국내 주식 거래에 시스템 개선을 지시한 것과 같이 해외 주식에도 CCF 방식 등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 내부 통제를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금융 IT업계 관계자는 “금융권이 저마다 디지털 혁신을 강조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IT 인프라 투자를 단순 비용으로 여겨서는 혁신은커녕 신뢰만 잃을 수 있다”면서 “마케팅에만 집중하기보다 안정된 서비스가 가능한 IT 기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근일기자 ryuryu@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