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부, 반도체·디스플레이 역학 조사 없이 산재 인정 논란

산업계 "발병 요인 다른데 협의 없이 과학적 조사 없애" 비판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계 종사자 산업재해 인정에 역학 조사를 생략하기로 했다. 법원 판결로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사례이거나 유사 공정 종사자라면 역학 조사 없이 바로 산재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다.

산업계는 협의도 거치지 않은 일방 결정이라며 반발했다. 직업병 요인이 개인 특성이나 공정 과정 변화에 따라 제각각 다른 데도 역학 조사 과정을 없앤 것을 두고 비과학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다른 업종으로도 정책 확대를 검토하고 있어 논란은 산업계 전반에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1】고용노동부는 근로복지공단과 법원 판결로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 사례와 동일 또는 유사 공정 종사자에게 발생한 직업성 암 8개 상병에 대해 업무 관련성 판단 과정을 간소화한다고 6일 밝혔다. 백혈병, 다발성경화증, 재생불량성빈혈, 난소암, 뇌종양, 악성림프종, 유방암, 폐암 등이 대상이다.

고용부는 “직업성 암 조사 과정에서 통상 6개월 이상이 소요돼 산재 보상 결정이 늦어진다는 것과 역학 조사 실시 획일화 등 불필요한 절차로 신청인에게 부담이 가중된다는 점을 고려, 절차를 개선했다”고 설명했다.

작업(노출) 기간, 노출량 등에 대한 인정 기준(당연 인정 기준) 충족 시 반증이 없는 한 인정하고, 미충족 시에도 의학 인과 관계가 있으면 인정한다. 2011년 1월 1일 이전 입사자 가운데 1996년 1월 1일 이후 퇴직자가 대상이다. 1년 이상 재직했고, 퇴직 후 10년 이내에 발병한 이들로 한정한다.

고용부는 앞으로 8개 상병 이외에도 법원 등을 통해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는 사례가 늘어나면 해당 상병을 추가한다는 방침이다.

산업계는 반발했다. 제도 이행 주체인 산업계와 협의 없이 일방으로 절차를 바꿨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같은 정책을 결정할 때는 산업계나 노동계 등 이해 당사자와 협의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관례였다”면서 “이번에도 그런 절차가 아예 없었다”고 비판했다.

고용부는 이에 대해 법원 판례가 나와 있기 때문에 따로 협의가 없더라도 산업계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산업계는 오락가락하는 법원 판단에도 의문이 많다며 재반박했다. 산업계 관계자는 “근래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 산재 불승인 조치가 승인으로 뒤집힌 판결을 보면 과학 및 의학 근거보단 '사회 부조'나 근로자 보호라는 포괄 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개별 사안이 다 다른 데도 그러한 추정을 근거로 산재 인정을 해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정권이 바뀐 후 산재 불승인 판정이 '승인'으로 뒤집히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는 점도 물밑에선 논란거리다. 사회 분위기에 따라 판결이 갈팡질팡한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형평성 문제까지 제기됐다. 반도체, 디스플레이에서만 이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느냐는 것이다. 주평식 고용부 산재보상정책과 과장은 이에 대해 “다른 업종에서 발생하는 직업성 암도 업무 관련성 판단 절차 개선을 위해 올해 전문가 연구 용역에 들어갔다”면서 “연구 결과를 토대로 내년에 의학자문위원회 논의 등을 거쳐 그대로 적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 전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고용부 발표에 “업무 관련성 인정을 근간으로 하는 산재보험법령과 산재보험제도의 기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경총은 “정부가 노사간 협의나 의견 수렴을 전혀 하지 않고 산재 인정 처리절차를 일방적으로 개선하는 것은 문제”라며 “향후 현행 법령과 역학조사의 취지를 고려하고 노사간 합의를 거쳐 합리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계는 정부 일방의 직업병 정책에 대해 '자초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내놨다. 그동안 다양한 직업병 문제에 대해 정면 돌파하지 않고 조용히 넘기는데 급급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죽음의 산업'으로 낙인찍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함봉균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hbkon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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