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한국과 미국 통신회담이 열린 미국 워싱턴D.C 무역대표부(USTR) 회의실. 새벽 3시경 한국측 수석대표가 폭탄선언을 했다. “이런 식이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다. 협상결렬을 선언한다.” 대표단은 곧장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한미관계에서 상상할 수 없는 초유 사태였다. 30여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외교가에서 널리 회자하는 유명한 일이다. 당시 한국측 수석대표가 박성득 한국해킹보안협회장(전 정보통신부 차관)이다.
박 회장은 한국정보화 산증인이다. 정보통신기술(ICT) 외길 인생 60여년. 작은 키에 호방한 성격이어서 별명이 '작은 거인',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에 비유해 '박소평'이다. 공직생활은 한국 ICT사와 흐름을 같이 한다. ICT계 기술대부(代父)로 기술고시 출신 첫 차관이란 기록도 세웠다. 전전자교환기(TDX) 개발부터 세계 첫 CDMA 상용화,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사업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차관 퇴임 후 한국전산원장(현 한국정보화진흥원)과 전자신문 대표이사 발행인을 거쳐 2008년 한국해킹보안협회를 설립, 10년 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국내 최장수 ICT 현역이다.
-해킹보안협회를 설립한 이유는.
▲ICT 강국은 해킹보안 대책이 완벽해야 한다. 지금도 사이버전은 치열하다. 초연결 사회에서 해킹보안은 시대 화두다. 정부와 기업, 개인 정보해킹에 따른 피해를 막고 국민 보안의식 고취를 위해 협회를 설립했다. 설립 10년째다.
-회원사 현황은.
▲회원사는 40여개다. 기업과 단체, 학교 등이다.
-해킹보안협회 올해 역점사업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게 해킹 보안에 대한 국민 의식 제고다. 이를 위해 해킹보안 교육과 캠페인, 콘퍼런스, 세미나를 매년 열고 있다. 내 정보는 내가 지킨다는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어떤 일을 했나.
▲해킹보안 분야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대표적인 게 매년 실시한 해킹보안전문가 자격시험이다. 지금까지 1600여명에게 자격증을 발급했다. 매년 해킹보안 세미나, 직장 교육, 학교교육을 실시했다. 해킹과 보안은 창과 방패 관계다. 정부나 기업, 개인이 해킹보안에 더 많은 투자와 노력을 해야 한다. 자율주행차나 각종 전산망, IOT 제품이 사이버공격 대상이 된다면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사전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
-개인 해킹보안 안전 수칙은.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정품을 사용하고 보안 패치를 설치해야 한다. 또 출처가 확인되지 않는 메시지는 접속하지 않아야 한다.
-기업체에 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가 없는데.
▲기업 정보는 기업 생명선이다. 기업이 CISO를 두지 않고 최고정보관리책임자(CIO)가 겸직하고 있는데 CISO를 임명해야 한다. 아니면 CEO가 CISO를 겸직해야 한다.
-1989년 2월 한미 통신협상장에서 협상결렬을 선언한 이유가 궁금하다.
▲미국이 슈퍼 301조를 앞세워 한국 시내, 국제전화, 무선전화 서비스를 1990년부터 개방하라는 압력을 계속했다. 시장을 개방하면 한국통신시장을 통째로 외국에 넘겨주는 일이었다. 통신주권이 사라진다. 미국 워싱턴 USTR 회의실에서 철야 협상을 했지만 미국은 요지부동했다. 국익을 위해 더 이상 회담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직을 그만 둘 각오로 “이런 식이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다”고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귀국했다. 당시 한미관계에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초유 사태지만 공직자는 국익이 최우선 아니겠나.(웃음)
-질책은 없었나.
▲귀국해 사직서를 들고 장관실로 올라갔다. 최영철 당시 체신부 장관은 “국익을 위한 일”이라며 오히려 격려했다. 그리고 계속 수석대표를 맡겼다. 그해 바로 한국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이사국에 진출했고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통신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정치 쟁점화 했는데.
▲정책이 정치에 휘말린 사건이다. 노태우 정부가 선정한 이통사업자를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이 백지화한 일이다. 1992년 8월 국내 처음 공개 채점제로 제2 이동통신 사업자를 선정했다. 체신부 정보통신정책실장인 내가 심사평가단장을 맡았다. 채점 결과 노대통령 사돈기업 선경그룹이 대주주인 대한텔레콤이 선정됐다. 특혜시비가 벌어져 정치권은 물론이고 부처 내에서도 쟁점이 됐다. 기준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고 공정하게 심사했기에 모든 심사 자료를 공개했다. 그래도 여론이 들끓자 대한텔레콤이 사업권 포기서류를 제출하러 체신부에 왔다. 나는 “반납사유가 정당하지 않으면 접수할 수 없다. 아울러 해당 기업은 앞으로 통신사업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후 체신부 잘못이 아닌 다른 사유로 사업권을 반납했다.(선경그룹은 문민정부 들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다. 현재 SK텔레콤 전신이다.)
-공직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많을 텐데.
▲수없이 많다. 1990년 시내전화 시분제 실시다. 당시 시외전화 요금은 엄청 비싼 반면 시내전화는 24시간 무제한 개방했다. FAX와 PC통신이 전화선에 물리면서 통화량이 급증해 통화두절 현상이 잦았다. 선진국은 정보량에 따른 요금제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반대여론이 높았지만 유관부처와 통신 사업자를 설득해 요금제를 도입했다. 정보량에 따른 요금제 시발점이다. 전파사용료 법제화를 추진한 일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 전파세로 법제화를 추진했으나 반대에 부딪쳐 전파사용료로 변경해 국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돈이 무선통신과 전파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다른 부처에서 '봉이 김선달'이 등장했다고도 말했다. 1991년 당시 업계는 CDMA와 TDMA를 놓고 표준화 갈등이 극심했다. 위원회를 구성해 CDMA 방식을 표준 기술로 정했다. 이동사업자와 삐삐사업자를 지정하면서 체신부 주파수 과장이 직접 외국과 다른 주파수를 배정해 외국산 장비도 외산 도입을 막았다. 이게 통신강국으로 발전하는 울타리가 됐다.
-가장 아쉬웠던 일은 무엇인가.
▲정보통신인들을 위한 정보통신회관 건립을 추진하다 중단한 일이다. 아직도 정보통신회관이 없다. 가장 아쉬운 일이다.
-기억에 남는 공직자는.
▲공직을 수행하다 숨진 두 사람이 늘 가슴에 남아있다. 한 사람은 한미통신회담을 추진하다 과로로 숨진 고 박창환 과장이다. 또 한 사람은 초고속정보통신망 사업에 전념하다 시달림을 받아 암으로 숨진 고 천조운 국장이다. 두 사람은 휴일도 없이 국가에 헌신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한 공직자가 있었기에 한국이 ICT 강국으로 발전했다.
-역대 정부 ICT 정책 특징은 무엇인가.
▲역대 정부마다 나름대로 ICT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0년대는 대부분 통신장비를 수입해 사용했다. 전화 공급이 어려워 당시 전화가입권이 강남 아파트 한 채 시세와 같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체신부에 첨단전자교환기 개발에 총력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는 부처 업무보고를 차트로 못하도록 지시하고 중견 공무원으로 선진조국 창조단을 구성해 선진국에 파견했다. 국가기간 전산망사업을 추진하고 전전자교환기개발에 240억원을 배정했다. 노태우 정부는 미국의 한국통신시장 개방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통신시장 경쟁력을 강화하고 통신 사업자 간 경쟁과 다원화를 추진했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는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했고 초고속정보통신망 20개년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인터넷강국을 건설하는 기반 계획을 수립했다. 김대중 정부는 전자정부 구현에 총력을 기울였다. 노무현 정부는 인터넷 강국을 구현했다. 노 대통령은 전문가 수준 PC 운용 지식을 갖추고 있어 인터넷대통령으로 불렸다. 이명박 정부는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던 ICT 강국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를 해체했다.
-좌우명과 취미는.
▲선친께서 “사내는 서울로 가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 따라 서울로 왔으나 그해 선친이 별세하셨다. 고학을 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좌우명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다. 그런 신념으로 오늘까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박성득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은 가난한 집안 수재가 다 모인다는 체신고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성균관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통신관리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에서 명예 공학박사, 한국정보통신대학교(현 KAIST)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체신부에서 공직생활을 시작, 청와대 경호실 통신지원반 과장,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전파관리국장, 한미통신회담 대표, 니스와 교토 ITU전권위원회 수석대표, 체신부 통신정책실장,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단장, 정보통신부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급만 5년 넘게 재직했다. 정통부 차관 임명장 수여식에는 직원 넥타이를 빌려 매고 참석해 화제가 됐다. 퇴임 후 한국전산원장, 한국정보통신기술인협회장, 전자신문 대표이사 발행인, 한국인터넷진흥원 이사장,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해킹보안협회장이다. 선이 굵고 소탈하지만 공사(公私)가 분명하다. 녹조근정훈장과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러시아 공훈메달, 대한민국 인터넷 대상을 수상했다.
<이현덕이 만난 생각의 리더는 이번 호로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애독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