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브뤼셀에서 양측 정상 임석 하에 한국-유럽연합(EU) 디지털통상협정(DTA)이 서명됐다.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체결한 양자 디지털통상협정이자, 5대 교역 상대와는 최초로 맺은 총 42개 조항의 독립 협정이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종이 없는 무역'과 '전자인증·서명'을 통해 업무처리가 빨라지고 양측 국민의 편익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
협정에서 디지털 교역 원활화의 실행 수단이 곧 전자문서와 전자서명의 신뢰다. 협정은 전자적 형태라는 이유만으로 문서와 서명의 효력이나 증거능력이 부인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제10조), 이 원칙을 국내법이 정한 범위에서 전자인장·전자타임스탬프·전자등록배달서비스까지 확장했으며, 전자송장의 국경 간 상호운용성 촉진(제17조)과 종이 없는 무역(제18조)을 함께 규정했다. 통상의 이행 수단이 디지털 신뢰 기술로 바뀌면서, 통상과 정보통신 두 영역의 협력이 필수가 된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행의 법적 기반이 이미 있다.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전자상거래 모델법을 토대로 제정된 전자문서 및 전자거래 기본법(이하 전자문서법)과 같은 해 제정된 전자서명법이 그것이다. 유럽의 신뢰서비스 규범인 eIDAS 역시 국내 전자서명 관련 제도 논의에서 주요 참조 기준으로 다뤄져 왔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전자문서법 전담기관이자 전자서명법에 따른 인정기관으로서 관련 법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협정 이행을 뒷받침할 두 법의 개정 연구반도 운영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상호인정'이다. 협정은 이를 의무가 아닌 자발적 협력으로 열어 두었지만, 기업이 체감할 실익이 여기에 달려 있다. 상호인정은 양측이 규격을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체계를 유지한 채 상대국의 인증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27개 회원국의 단일 규범을 가진 EU와의 사이에서 동등성을 입증하는 잣대는 사실상 EU의 eIDAS로 수렴할 공산이 크다. EU의 검증 체계는 각국이 발행하는 신뢰목록에 기대어 서명의 적격 여부를 판정하는 구조여서, 우리 사업자가 국제 형식의 신뢰목록에 담기지 않는 한 우리 전자서명이 EU에서 적격 수준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기는 어렵다.
발효를 앞둔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기업의 전자문서와 전자서명이 EU에서 그대로 검증·인정받게 하는 체계다. 국가 신뢰목록의 발행, 국제 기준에 따른 적합성평가·인정, 국경 간 검증 기반이 그 뼈대이며, 이는 전자문서법과 전자서명법이 부여한 법정 기능 위에서 세울 수 있다. 이는 그간 축적된 전자무역 인프라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신뢰의 층을 더하는 일이며, 통상당국의 협상과 기술기관의 검증·인정이 맞물릴 때 비로소 작동한다. 유사한 조항이 포함될 후속 디지털통상협정에도 다시 쓰일 국가 자산이기도 하다.
국가 간 협정의 서명이 약속이라면, 상호인정 체계는 그 약속을 기업의 일상으로 바꾸는 다리다. 종이 없는 무역이라는 말이 기업 현장의 체감으로 이어지려면, 협정이 발효되기 전인 지금 그 다리를 놓기 시작해야 한다.
전진형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디지털문서혁신팀 팀장 jjh@kisa.or.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