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통신+금융 빅데이터 연구소가 정부 규제와 시민단체 반발로 결국 문을 닫았다. 통신과 금융 빅데이터를 결합해 국내 신용평가 모델을 고도화하고 여신평가, 상권분석, 지방자치단체 공익 사업에 활용하려던 연구소다. 상황이 이런데도 금융 당국은 정치권 눈치만 보며 당초 계획한 법 개정과 빅데이터 통합 활용 사업 등을 외면하고 있다.
5일 정보통신(IT)·금융권에 따르면 통신 정보와 금융 정보를 결합해 한국 빅데이터 산업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를 모은 '비씨카드 빅데이터 연구소'가 분리돼 빅데이터 전담인력들은 디지털결제연구소와 마케팅부문 등 유관조직으로 배치됐고 연구소장은 사직했다.
비씨카드 빅데이터 연구소는 출범 당시 화제를 모았다. KT가 보유한 통신 정보와 비씨카드가 집적해 놓은 카드 거래 정보만 합쳐도 국내 최대 데이터가 모인다. 보유한 정보는 100억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소는 출범 후 전국 지자체와 협약을 맺고 빅데이터 산업 고도화를 추진했다. API를 통한 스타트업 빅데이터 활용 방안까지 제시했다. KT도 다양한 기술 우위 기업에 빅데이터를 제공, 상생 사업까지 구상한 바 있다. 그러나 신용정보법 개정이 차일피일 미뤄진 데다 잇따른 시민단체 어깃장으로 연구소는 사실상 문을 닫게 됐다.
빅데이터 연구소는 '디지털 연구소'로 개편됐다. 디지털 연구소는 빅데이터 전담 조직이 아니다. 그동안 빅데이터 사업을 이끌던 내부 인력도 흩어지면서 사실상 조직을 해체했다.
인력 절반은 '디지털 연구소'로 배치됐고, 나머지 인력은 고객의 매출을 분석하는 고객분석팀에서 업무를 수행 중이다.
빅데이터 연구소 관계자는 “정부 규제 완화와 법 개정이 미뤄지면서 빅데이터 사업을 계속하기엔 여력이 없다”면서 “돈도 돈이지만 기약 없는 정부 규제 완화 약속만 믿고 기다려 온 수많은 기업이 빅데이터 사업을 대폭 축소하거나 아예 사업을 접으려는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고 말했다.
KT도 비씨카드 정보를 융합해 '통신 전문 CB' 설립과 빅데이터 컨설팅 사업 등 다양한 계획을 수립했지만 규제에 가로막혔다.
다른 금융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신한카드도 빅데이터 전담 조직을 구축하고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지만 내부 정보를 수집, 가공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대폭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나금융도 SK텔레콤 통신 정보를 융합해 신용평가 신모델까지 만들었지만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차원 신용정보법 개정과 '통신+금융 정보 규제'를 지금이라도 조속히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 사업도 실망스럽다. 흩어진 금융 데이터를 집적해서 통합 관리하는 신용정보원이 2년 전에 출범했지만 잇따른 시민단체 고소·고발로 빅데이터 통합 사업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신용정보원은 정부가 빅데이터 산업 허브로 만들겠다며 설립한 조직이다. 은행연합회, 여신금융협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금융투자협회, 보험개발원 등 6개 기관에 흩어져 보관되던 신용 정보를 통합 관리한다. 그러나 개인 정보 유출 등에 민감한 시민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신용정보원은 지난해 말 금융권 대출·연체·체납 및 보험 계약과 사고 이력 정보 등을 결합해 '신용정보 표본 데이터베이스(DB)'까지 구축했다. 중소형 금융회사, 핀테크 기업 등은 이를 이용해 상품 개발이나 시장 분석 등에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참여연대 등 12개 시민단체가 신용정보원, 한국정보화진흥원 등 4개 비식별 전문 기관과 SK텔레콤 등 20개 기업을 개인정보보호법 등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한국 빅데이터 사업은 멈춰 섰다.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빅데이터 산업 규제 완화 일환으로 시민단체 설득에 나섰지만 공염불에 그쳤다.
길재식 금융산업 전문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