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해 입증 책임을 왜 근로자가 져야 하나.”
노동단체 운동가들이 종종 하는 말이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맞지 않다. 1차 입증 책임은 정부가 지는 것이다. 근로자가 산재 신청을 하면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가 맞는지를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도 들여다본다. 근로복지공단이 “당신 산재가 아니오”라고 판단하고, 근로자가 불복하면 그때서야 행정 소송으로 간다. 입증 책임은 문제를 제기한 쪽에서 지는 셈이다. 그러니 근로자 입증 책임 불합리 운운하는 것은 사회 약자 프레임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지난 2월 1일 대전고등법원은 삼성전자 온양 반도체 패키지 공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유족에게 공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 조사를 못 믿어서 “나도 보겠다”면서 이 같은 공개 신청을 냈다. 1심 비공개 판결이 2심에서 뒤집어졌다.
보고서 공개 판결을 내린 대전고법 허용석 부장판사는 “해당 정보가 삼성전자의 경영·영업 비밀이라 보기 어렵고, 해당 정보가 공개돼도 삼성전자의 정당한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동 운동가 출신인 김영주 장관이 이끄는 고용부는 즉각 대법 상고를 포기하고 자료를 공개했다. 최근에는 제3자인 방송사 PD와 노무사에게 삼성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휴대폰 공장 작업환경측정보고서를 모두 공개키로 방침을 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삼성 산재 소송을 이끌다 고용부 고위 공무원으로 영입된 박영만 산재예방보상정책국장은 “기업 비밀 침해 여지가 없다는 게 법원과 전문가들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17일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전문위원회는 이 자료에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돼 있다고 판단했다. 진짜 반도체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다.
국가 핵심 기술이 포함된 자료를 영업비밀도 아니라 판단한 부장판사, 별개 사안인 데도 법원 판단을 근거로 다른 공장 보고서까지 모두 공개하는 게 타당하다는 고용부 장관과 국장, 그리고 알권리·사회약자 운운하는 노동 운동가. 지금 우리 사회는 이성보다 선전선동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