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I 과학향기]유럽인의 피부는 처음부터 희지 않았다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에게 새 크레파스를 사주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크레파스에 이름표를 붙여주던 날이었다. 빨강, 주황, 노랑, 연두, 초록, 파랑처럼 발음마저도 귀여운 색색의 크레파스 속에 낯선 이름이 하나 보였다. '살구색'이라는 이름의 크레파스였다. 필자가 어릴 적엔 '살색'이라고 불렸던 바로 그 색이었다. 2000년대 초 “크레파스 특정 색을 '살색'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종차별”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진정이 받아들여져 현재는 기술표준원에서 해당 색깔을 '살구색'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살색에서 살구색으로 글자 하나만 추가됐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어감이 확 달라져 훨씬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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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살색'은 저마다 다르다. 흰 눈처럼 창백한 하얀색부터 탐스러운 살구색, 잘 익은 알밤을 담은 갈색에서 밤하늘을 닮은 윤기 나는 검은색까지 매우 다양하다. 사람들 피부색이 이토록 다양한 이유는 사람마다 피부에 존재하는 멜라닌 색소의 종류와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멜라닌은 피부의 기저층에 존재하는 멜라닌세포(melanocyte)에서 만들어지는 갈색 혹은 검은색 고분자 색소 물질이다. 멜라닌세포가 멜라닌을 적게 합성할수록 피부는 희고 창백해지는 반면 많이 합성할수록 짙어지고 검게 변한다.

사람들마다 유전적으로 멜라닌세포 활성이 다르기 때문에 선천적으로 피부가 흰 사람과 검은 사람이 존재하지만 한 개인 일생을 살펴보면 멜라닌세포 활성이 늘 일정한 것은 아니다. 멜라닌 합성은 외부 자극의 영향을 받아 조절되기 때문이다. 멜라닌 활성을 증폭시키는 자극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외선이다. 자외선은 생물 DNA 손상을 가져오므로 생물체는 특히 자외선과 맞닿은 피부세포 손상을 줄이고자 멜라닌을 만들어 자외선을 막는다. 다시 말해 멜라닌은 피부에 그늘막을 덮어 해로운 자외선이 피부 세포 깊숙이 파고들어 DNA를 난도질하는 것을 막아주는 일종의 보호 장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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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유럽인의 피부는 처음부터 희지 않았다. (출처: shutterstock)

지구의 대기권에는 오존층이 존재해 태양에서 유입되는 자외선 거의 대부분을 막아내지만 오존층을 통과해 지상으로 유입되는 1~2% 자외선만으로도 세포를 죽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따라서 지구상의 생물체들, 사실상 거의 모든 동물들은 멜라닌 색소를 갖고 있으며 인류의 조상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백만년간 인류의 가장 보편적 피부색은 갈색 혹은 검은색이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인류의 피부에서 본격적으로 멜라닌이 적은 '흰 피부'가 나타난 것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시기 이후, 그러니까 최근 1만년 안쪽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15년 인류학자들은 소위 '백인'들 주요 거주지였던 유럽 전역에서 수집된 고대인 83명 유전체를 분석해 고대 유럽인들 모습을 유추하는 다국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이 프로젝트의 원래 목적은 8000년 동안 유럽 지역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 조상들이 가진 유전적 형질 중 환경적 특성에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퍼져 나간 유전적 형질이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유럽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 조상들이 지니고 있던 유전자 중 다섯 가지가 훗날 이들 지역에 살게 되는 후손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5개 유전자 목록에는 유당을 분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유당분해유전자, 키를 커지게 하는 유전자군, 피부를 탈색시키는 유전자 2개(SLC24A5, SLC45A2), 그리고 금발과 흰 피부, 푸른 눈과 연관된 유전자 HERC2/OCA2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처음 아프리카의 초원에서 발생한 인류는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졌고 점차 고위도 지역까지 서식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비타민 D 때문이었다. 비타민 D는 칼슘 대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물질인데 비타민 D가 부족하면 칼슘 대사가 제대로 일어나지 않아 각종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골다공증과 구루병이다. 비타민 D 부족으로 인해 당뇨, 근육통, 충치, 편두통, 우울증 및 기억감퇴증, 치매 증상 등이 나타날 수 있다. 각종 암의 발병률 역시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체에서 칼슘이 가장 많이 축적돼야 하는 뼈의 이상은 결정적이다.

비타민 D는 간, 우유 및 유제품, 버섯 등의 식품을 통해서 흡수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피부를 통해서 직접 만들어진다. 우리의 피부 세포는 자외선을 이용해 콜레스테롤을 변형시켜 비타민 D를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자외선은 비타민 D를 만드는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DNA 파괴자이므로 우리 몸은 멜라닌을 통해 자외선을 적절하게 걸러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일조량이 풍부한 저위도 지역에서는 멜라닌을 통해 자외선 대부분을 걸러내도 비타민 D를 합성하는데 필요한 양을 얻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인류가 고위도 지역까지 올라가기 시작하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고위도 지역에는 일조량이 적어 자외선 조사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짙은 색 피부가 걸러내는 미량의 자외선만으로는 충분한 양의 비타민 D를 합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지역에 사는 경우에는 탈색 유전자가 작동해 피부색을 옅게 만들고 자외선 필터링을 줄여주는 것이 생존해 유리한 형질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피부가 흰 사람들이 북부 유럽에 등장하게 된 이 시기가 약 8000년 전경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흰 피부 사람들은 북부 유럽에 한정돼 있으며 이베리아 반도와 유럽 중앙에 살던 사람들의 피부는 여전히 짙은 색이었다. 흰 피부는 일조량이 부족한 곳에서 비타민 D를 공급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 뿐 그 자체가 유리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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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유당분해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흰 피부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출처: shutterstock)

흰 피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 계기에는 엉뚱하게도 우유와 관계가 있다. 원래 인간은 어른이 되면 우유 속에 든 유당을 분해하는 능력이 사라진다. 유당을 분해하는 유당분해유전자는 젖을 떼고 난 이후 활동을 정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 6000여년 전부터 목축과 낙농을 주로 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유당분해유전자 활성이 꺼지지 않는 돌연변이 종족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들은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게 되면서 덤으로 우유 속에 풍부하게 든 칼슘과 비타민 D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특히나 목축과 낙농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고 건조한 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흰 피부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우유 속에 풍부한 칼슘과 비타민 D 덕분에 이들 뼈가 제대로 성장하며 충실도가 높아졌고 이를 계기로 이들은 점차 세력권을 넓혀 나가게 됐다. 고대 유럽인들 몸속에서 탈색유전자와 유당분해유전자, 키성장유전자군이 함께 선택된 건 이런 복합 환경과의 상호작용 때문이었다.

근대 문화적 환경 속에서는 소위 '우월한 인자'로 간주됐던 유럽인 흰 피부가 사실 햇빛이 부족한 지역에서 뼈가 굽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던 고대인들의 유전적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피부색으로 사람을 가르고 차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부당한 행위인지를 알리는 것, 그것 역시도 과학 역할인 것이다.

글: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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