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이 화두다. 세계인의 관심이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첨단 신기술에 모아지고 있다. 정부와 연구소, 대학 등이 앞 다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신기술을 선정하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일부 기술은 이미 상용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제품 설계와 생산 등 제조 분야에서부터 행정서비스와 사회 환경, 교육 등 거의 모든 일상에서 4차 산업혁명의 결과물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원장 한선화)이 '초고성능컴퓨팅(HPC)'을 4차 산업혁명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필수 기술로 인식, 연구에 나섰다.
HPC는 고급 연산 문제를 풀기 위해 특수 목적에 맞게 하드웨어(HW)와 이에 최적화된 소프트웨어(SW)를 포함, 설계·구현한 초고속의 대규모 시스템이다. 보통 컴퓨터보다 연산 속도가 수십~수백 배 이상 빠른 컴퓨터라고 보면 된다. 매년 6월과 11월에 슈퍼컴퓨팅 콘퍼런스에서 발표하는 성능 순위 500위권 컴퓨터를 의미하기도 한다. 국내에는 기상청,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KISTI와 산업체 등이 보유하고 있다.
HPC는 이미 주요 선진국에서는 국가 경쟁력 제고의 핵심 요소로 인식해 적극 투자,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분야다.
2015년 9월에는 미국 리빙스턴과 핸퍼드의 레이저 간섭계 중력파 관측소(LIGO)에서 중력파 검출에 성공했다. 대용량 실험 데이터 분석으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중력파를 예측한 이래 100년 만에 이룬 세기의 쾌거였다.
지난해 3월에는 인공지능(AI) 바둑 '알파고'가 등장,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진 한계를 넘어서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빅데이터'와 '컴퓨팅 자원'이다. 중력파 검출에는 대용량 실험 데이터를 축적해 분석할 수 있는 컴퓨팅 인프라가 있었고, 알파고도 인간이 1000년을 쌓아 온 대국 기보 3000만건을 단기간에 학습할 수 있는 컴퓨팅 자원이 있었다.
엄청난 분량의 데이터를 저장, 처리, 분석할 수 있는 거대한 컴퓨팅 자원인 HPC의 도움이 없었다면 AI도 존재하기 어려웠다. 빅데이터를 활용하는 것도 요원한 이야기가 된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도 먼 얘기가 된다.
조 케저 지멘스 회장에 따르면 인류가 2000년까지 생산한 데이터가 총 2엑사바이트(EB·1EB는 약 10억GB)다. 요즘에는 하루 만에 이 정도 분량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이엠씨 보고서에는 연간 데이터 생산량이 2013년 4.4조GB인데 2020년 44조GB로 10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유럽위원회(EC)는 이를 처리하기 위한 HPC 자원이 꼭 필요해질 것으로 보고 2012년부터 HPC 전략을 수립했다. 4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를 저장, 분석, 공유할 수 있는 HPC 자원을 통해 구현될 것으로 예측한 것이다.
세계는 벌써부터 HPC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미국은 1991년 고성능컴퓨터 법안, 2004년 고성능컴퓨팅 부흥법안을 제정해 HPC 및 관련 기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2014년에만 15억3400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중국은 2013년 세계 1위의 HPC를 개발한 후 국가 주도로 투자를 거듭하고 있다. '863계획'에 따라 초고성능컴퓨팅을 정보 기술 영역의 핵심 분야로 삼았다. 일본도 1980년대 후반부터 과학기술기본법 및 기본계획에 근거, HPC 분야를 육성하고 있다.
세계 HPC 보유 구도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주요국 초고성능컴퓨터 육성 입법정책 동향'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9월 기준 톱500 HPC 가운데 168대를 보유하고 있다. 전년 대비 59대나 늘었다. 일본도 29대를 보유하고 있다. 북남미는 170대, 유럽은 104대를 각각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 HPC 인프라는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위상에 걸맞지 않게 크게 뒤떨어져 있다. 국내 HPC 보유 대수는 7대에 불과하고, 성능은 세계 10위권이다.
아시아에서도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에 뒤처진다. 실측 성능 기준 1993~2005년 세계 10위 수준을 유지했지만 2008년 11월 이후 세계 30위까지 순위가 하락했다. 2010~2013년에는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에 정부는 올해 안에 '2차 국가초고성능컴퓨팅 육성 기본계획'을 수립, 국내 HPC 활용 생태계를 새롭게 다질 계획이다. 2018~2022년 5년 동안 HPC 활용을 위한 HW 및 SW 플랫폼과 초고성능컴퓨팅 초고속망을 구축할 계획이다. 모든 정부 부처의 HPC 수요를 파악, 이를 망라하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안도 포함시켰다.
국가 슈퍼컴퓨팅센터를 보유한 KISTI가 대표 선수로 나섰다. 최근 미래창조과학부와 '지능정보사회를 위한 컴퓨팅 역량 강화 방안 기획 연구'에 착수했다.
KISTI는 1988년 HPC 1호기를 시작으로 1993년 2호기, 2002년 3호기를 구축했다. 지금 사용하는 4호기는 2009년에 도입했다. 현재 5호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KISTI는 초고성능컴퓨팅 플랫폼을 개발하고 기반을 조성, 국가 과학기술과 산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물리·생물학·디지털 세계를 빅데이터로 통합하고, 고성능컴퓨팅 기반으로 데이터화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생산성을 높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내 4차 산업혁명의 조정자(Enabler)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전략이다.
올해는 시스템 구축에만 580억원을 투입, '초고성능컴퓨터 5호기'를 구축한다. 5호기를 갖추면 HPC 세계 톱500 기준 10위권에 진입하게 된다. 5호기 목표 이론 성능은 25.7페타플롭스(PF·초당 1000조변 연산)급으로, 4호기의 300테라플롭스(TP·초당 1조번 연산)보다 70배 향상된 수준이다. 최신 트렌드를 반영, 중앙처리장치(CPU)와 그래프처리장치(GPU) 가속기를 결합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HPC 전용의 슈퍼컴퓨팅 복합지원동을 완공, 연말이면 시스템 구축을 완료한다.
KISTI는 이 같은 초고성능컴퓨터와 국가데이터센터, 초고속연구망 등 핵심 인프라를 기반으로 △연구개발(R&D) 및 인력 양성 △인프라 확보 △활용 역량 강화에 나선다.
우선 슈퍼컴퓨터 시스템부터 엑사스케일 컴퓨팅 시스템을 갖춘 R&D 인력을 양성한다.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 최고기술경영자(CTO), 대학과 연구소 전문 인력, 공공기관과 대기업 관계자가 모인 '개방형협업플랫폼'을 구성해 인력 양성 서비스를 제공한다.
연내에 도입하는 5호기를 인프라로 활용, 빅데이터 저장 및 분석과 공유를 위한 환경도 구축한다. HPC 자체 개발도 추진한다. 2020년까지 매년 100억원을 투입, 1PF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할 계획이다.
활용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도 펼친다. 과학·공학 및 사회·산업 문제 해결에 HPC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특정 분야에 머물고 있는 HPC를 범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활용 분야를 넓혀 나갈 방침이다.
이필우 KISTI 슈퍼컴퓨팅본부장은 “HPC는 AI, 빅데이터, IoT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 핵심 기술 구현에 필요한 필수 기반 기술”이라면서 “미래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해 투자해야 하는 분야”라고 강조했다.
<KISTI 슈퍼컴퓨터 도입 변천사>
<초고성능 슈퍼컴퓨터 5호기 구축 사업 추진 경과>
대전=김영준기자 kyj85@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