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은 중국 패널 제조사들이 적극 뛰어들고 액정표시장치(LCD) 생산량을 늘리면서 공급 과잉 현상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공급 과잉이 발생하면 가동률을 낮추는 게 시장의 일반 패턴이다. 하지만 빠르게 양산 경험을 축적해야 하고 수율이 낮아도 제품 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중국 특유의 기업 환경은 기존 시장 질서를 깨뜨리고 있다.
업계는 중국이 신설하고 있는 8세대 라인과 초대형 10세대급 라인에서 제품을 본격 생산하는 2019년부터 중국발 LCD 공급 과잉 현상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전까지는 패널 제조사들이 저세대 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새로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생산량을 늘리는 전략 변화를 꾀하고 있어 제조사 주도로 시장 가격을 형성하는 흐름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흔들리는 크리스털 사이클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은 패널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를 촉발하는 이른바 `크리스털 사이클`이 약 2년 주기로 반복돼 왔다.
장치 산업 특성상 공급이 부족하면 대규모 설비 투자가 필요하다. 투자를 집행해 신규 설비를 가동하는 2년 후에 공급이 늘면 공급 과잉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패널 가격이 하락하게 된다. 이는 다시 수요를 촉발시켜서 공급 과잉 현상을 완화시킨다. 시간이 흐르면서 수급 균형을 이루다가 다시 공급이 부족해져 가격이 상승하는 구조를 반복하게 된다.
전문가들은 2006년께부터 크리스털 사이클 주기가 다소 짧아진 것으로 분석한다. 대규모 설비 투자가 촉발시키는 변화보다는 경기 침체로 가격이 하락해도 수요가 늘지 않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경기 침체뿐만 아니라 소비자 구매욕을 이끄는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앱)이 등장하지 않는 등 소비자 심리도 크리스털 사이클 변화 요인의 하나로 꼽힌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에 벌어진 공급 과잉과 평균거래가격(ASP) 하락 현상이 예상보다 빠르게 완화된 것은 제조사 주도로 크리스털 사이클의 불황 기간을 인위로 단축시킨 사례로 꼽는다. 대만 지진 영향으로 패널 제조사 구매 심리를 위축시켰고, 이후 삼성디스플레이와 파나소닉의 저세대 생산 라인 가동 중단 발표는 시장 분위기를 빠르게 반전시켰다.
4월 기준으로 15개월 동안 하락한 32인치 패널 가격이 소폭 반등했다. 패널 가격이 바닥을 치면서 원가 이하 수준까지 형성하자 제조사가 생산 라인 가동률을 낮춰서 재고 수준을 빠듯하게 운영하려는 전략이 주효했다.
2월 대만에서 발생한 지진 때문에 TV 세트 제조사들이 패널 재고 확보에 심리 압박을 느끼면서 32인치와 40인치 안팎의 모델 재고가 준 것도 작용했다. 이에 더해 삼성디스플레이 LCD 라인에서 수율 문제가 발생해 공급 물량이 급격히 줄어들 것도 패널 가격 하락을 주춤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다.
시장조사 업체 IHS의 분석에 따르면 생산 라인 가동률은 지난 1월 82%, 2월 79.9%로 각각 떨어져 2013년 이후 처음으로 80% 이하 수준을 기록했다. 지난해 3분기까지 분기 평균 가동률 87~91%, 4분기 85%를 각각 기록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다.
4월부터 반등을 시작한 패널 가격은 다시 주요 크기의 모델 전반에 걸쳐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10월 상반기 기준 32인치 TV용 LCD 패널 가격은 연초보다 약 30% 올랐다. 대형 50인치 패널은 연초 대비 〃3% 수준으로 회복하고 있다. 노트북, 모니터 등 중소형 LCD 패널 가격도 일제히 상승세다.
패널 가격이 상승하면서 제조사 실적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기술 성숙도가 높고 경쟁이 치열한 LCD 사업에서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10세대 이상 라인이 본격 가동하기 전까지 LCD 강자들이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안정된 셈”이라면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양산 경험이 있는 한국 패널 제조사들은 LCD에서 얻은 수익을 OLED에 집중 투자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효율, 고부가가치에 집중…공급망 변화 불가피
하반기에 TV 세트 제조사가 연말연초 성수기에 대비하기 위해 재고를 축적하는 추세를 감안하면 패널 가격은 연말까지 상승할 것으로 업계는 전망했다.
패널 제조사들이 운영 효율이 낮은 저세대 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8세대, 고부가가치 제품 위주로 LCD 생산 전략으로 이동한 것도 디스플레이 업계의 불황 주기를 단축시키는 요인이다. 고부가가치 제품군 위주로 생산하면 가치 소비에 집중하는 최근 흐름에 비췄을 때 경기 침체 영향이 다소 덜하다. 공정 기술 성숙도가 안정되고 최신 기술이 반영된 8세대 라인 위주로 가동하면 중소형과 대형 TV용 패널을 신축성 있게 양산할 수 있어 패널 제조사에 유리하다.
삼성디스플레이는 다음 달 7세대 LCD 생산라인 일부인 L7-1의 가동을 중단하고 OLED로 전환할 계획이다. L7-1에서는 주로 40인치 TV용 패널을 생산해 왔다. 파나소닉도 일본 히메지 공장에서 생산해 온 32인치와 55인치 TV용 LCD 패널 공급을 중단했다. LG디스플레이도 노후하고 규격이 작은 LCD 제조라인 가동을 순차 중단할 계획이다. 세트사는 공급망 변화가 불가피하다.
IHS는 패널 제조사들이 생산 라인 가동을 중단하면서 패널 제조사가 반사이익을 얻고 세트 공급망에 변화가 발생했다고 분석했다.
노트북용 패널은 삼성디스플레이가 지난해 3000만대에서 올해 1200만대, 2017년 400만대 수준으로 출하량을 줄여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휴렛팩커드(HP)는 공급처를 이노룩스 등으로 다변화했다. 중국 BOE는 반사이익을 거둬 패널 출하량이 지난 1분기 490만대에서 2분기 790만대로 늘었다. 내년에는 노트북 패널 양산 규모를 3600만대 수준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애플도 공급망 변화가 불가피하다.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LCD 패널을 공급받았지만 사업 변화로 중국 공급사를 추가 선정할 가능성이 짙다고 IHS는 분석했다. 실제로 계약이 성사되면 애플이 중국산 LCD를 처음으로 채택하게 된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