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증권이 미래에셋증권에 인수된 데 이어 올해 마지막 `대어`인 현대증권의 매각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업이 이제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를 넘어 `기가시대`로 진입했다”고 입을 모았다. 빅 플레이어 여럿이 등장해 본격 활동하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에서다. 현대증권이 누구 품으로 들어가느냐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시장은 이미 기가시대를 꿈꾸고 있다.
국내 증권사는 이전까지 영업점을 활용한 소매 증권 중개 업무에만 관심을 쏟았다. 2010년만 해도 자기자본 3조원이 넘는 증권사는 한 곳도 없었다. 당시만 해도 2조원 넘는 회사도 대우증권, 삼성증권, 현대증권, 우리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5곳에 그쳤다.
하지만 자본시장법 통과 이후 변화가 시작됐다. 국내 증권사에도 투자은행(IB) 업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한 해 뒤인 2011년 대우증권, 우리투자증권, 삼성증권, 현대증권이 모두 자기자본을 3조원대로 늘렸다. 올해는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을 인수하면서 자기자본 7조원 시대에 첫 진입했다. 현대증권 합병 건이 성사되면 4조원 이상 증권사 3곳 탄생이 유력하다.
증권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규모가 늘어난 만큼 덩치에 맞는 사업을 찾아 시장에서 승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등 글로벌 IB가 추구하는 사업 모델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로벌 IB 자산관리·신흥시장 겨냥 사업 나서
최근 글로벌 IB가 눈을 돌리는 곳은 부유층 자산관리 시장이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가 대표한다.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헤지펀드를 상대로 돈을 빌려주거나 기관투자가를 대상으로 주식 중개를 해 주는 클라이언트 서비스가 주력이었다. 2009년만 해도 각사 수익의 72.4%와 56.1%를 차지했다. 하지만 2014년 클라이언트 서비스 사업 비중은 각각 44.1%와 49%로 줄었다. 부가 영역에 그친 자기자본 투자와 자산운용 사업이 커진 덕분이다.
글로벌 IB가 IB분야에서 눈여겨보는 곳은 아시아를 비롯한 신흥시장이다. 세계 IB 수익 가운데 북미가 차지하는 비중이 54.8%로 높지만 아시아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시아·태평양시장은 2014년 IB 수수료 규모가 전년 대비 17.6% 성장했다. 북미가 전년 대비 2.5% 성장에 그치고 일본이 10.6% 역성장을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부유층 자산관리 영역도 IB의 새 먹거리다. 세계 부유층 총자산 규모는 56조4000억달러에 이른다. 전년 대비 7.2% 증가했다. 2009년 이후 연평균 7.7% 성장세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세계 금융자산 규모는 앞으로 5년 동안 6.2% 성장세를 보일 전망이다.
골드만삭스가 2012년 이후 드와이트, 도이치에셋&웰스매니지먼트, 임프린트캐피털 등을 인수한 것도 이 일환이란 분석이다.
IB 간 인수합병(M&A)도 성과를 내고 있다. 노무라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리먼브러더스 아태·유럽·중동법인을 인수, 5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한 데 이어 미국·유럽 IB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중국내 1위 중신증권과 2위 하이퉁증권도 각각 2013년 CISA와 2014년 포르투갈 최대 IB인 BESI를 인수하면서 덩치를 키웠다.
현대증권 매각으로 자기자본 4조원 이상 국내 증권사가 세 곳으로 늘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다. 골드막삭스 자기자본은 2014년 말 기준 839억달러(113조원)에 이른다. 국내 증권사를 다 합친 금액 41조원의 2.5배에 달한다. 자회사가 332개, 임직원은 3만6000명이다.
외국계 증권사 지점을 제외하고도 34개 증권사가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 가운데 영업점을 10개 이상 보유한 곳만 해도 21곳에 이른다. 하지만 이 가운데 자기자본 1조원 이상 증권사는 11개사에 그친다. 좁은 시장에 사업자가 넘쳐난다. 합병으로 덩치가 커진 증권사도 기존 IB 영역이 아닌 자사만의 색깔을 가진 틈새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
◇기가 IB, 시대 변화 맞는 IT 전략 짜야
로이드 블랭크페인 골드만삭스 대표는 “우리는 정보기술(IT) 기업”이라고 강조하면서 전통의 IB 모델에서 벗어난 근본 혁신을 꾀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로보어드바이저와 크라우드펀딩 등 개인간전자상거래(P2P) 금융이 본격화됐다는 점에서 핀테크가 미래 사회에 변화를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저성장 고령화시대에 맞춘 전략이다.
실제로 이 회사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 인력은 1만1000명으로 전체 인력의 30%에 이른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크게 앞선다. 신규 사업 기회와 위험관리, 비용절감 등에서 IT 활용을 모색하고 있다.
골드막삭스는 우선 그동안 부유층에 집중해 온 소매영업을 일반고객으로 확대했다.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등을 통해 개인과 소기업을 상대로 온라인 대출을 중개한다. IT를 활용한 전략이다.
벤처투자자로 적극 변신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골드만삭스는 스퀘어(지급결제), 켄쇼(빅데이터), 서클(비트코인) 등 핀테크기업뿐만 아니라 우버와 배달의민족에 이르기까지 성장성 높은 스타트업에 전 방위 투자 손길을 뻗쳤다,
UBS도 아시아 중산층을 상대로 모바일 앱 기반의 맞춤형 자산관리서비스 `UBS 액티브 아시아`를 내놨다. 국내 역시 핀테크가 자본시장 안방에 들어섰다. 크라우드펀딩이 올해부터 본격화됐으며, 로보어드바이저업체가 저렴한 수수료와 대중 자산관리 기법을 모델로 시장에 진입했다. 특히 올해 하반기에는 비대면 일임 계약까지 허용돼 온라인으로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증권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단순히 자기자본으로만 승부해선 글로벌 IB와 붙어도 승산이 없다”면서 “덩치가 커진 증권사도 국내 강점인 IT를 활용한 새 금융전략을 제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경민 코스닥 전문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