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주도형에서 내수주도형으로.’
경제체질을 혁신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는 비상경고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8~10%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4%대로 급락했다. 2010년대에는 3%대에 그쳤다. ‘수출’이라는 성장엔진이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엔진이 필요하다.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내수’다. 경제체질을 완전히 내수주도형으로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장기적 성장잠재력을 확보하기 위해 수출과 내수의 균형성장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은 이달 초 펴낸 ‘한국경제의 새로운 도전-내수성장’ 보고서에서 수출중심국 위기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출중심국(수출비중이 세계평균보다 높은 나라)과 내수중심국 성장률이 역전됐다. 1970년대부터 2007년까지는 수출중심국 성장률이 항상 높았다. 그러나 2008~2012년 사이 평균성장률은 수출중심국 2.6%로 내수중심국 3.4%보다 낮았다. 특히 2008년 이후 수출비중과 경제성장과의 상관관계가 처음으로 마이너스가 됐다. ‘수출이 잘되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공식이 깨진 것이다.
보고서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수출주도형 경제체제가 위기에 빠진 이유를 크게 △수출주도 성장전략국가 증가 △세계교역 위축 △중국·일본과 경쟁심화 △원화절상에 따른 가격경쟁력 저하 네 가지로 짚었다.
우선 우리나라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많아졌다. 많은 나라가 유사한 산업 부문에서 수출을 확대하자 세계 시장에서 공급과잉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아시아 각국이 전기전자 산업을 집중 육성하면서 수출경쟁이 벌어진 게 대표적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교역도 급격히 위축됐다. 선진국에서 부채확대를 통한 수요확대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중국·일본과 경쟁이 심화된 것은 결정적 악재다. 중국의 대규모 투자에 따른 기술발전, 엔화약세를 통한 일본의 가격경쟁력은 우리 수출산업에 큰 타격이다. 여기에 원화절상에 따른 가격경쟁력 하락까지 겹치면서 우리 수출산업은 이중, 삼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됐다. 내수를 살리지 않고는 더 이상 성장이 어렵다는 게 전문연구기관의 공통적 진단이다.
◇새해 전망
새해에도 ‘수출경쟁력 저하·내수부진’이라는 이중고가 계속될 전망이다. 경제성장률은 3.5~3.6% 정도로, 2014년 3.6%와 비슷할 것으로 예상됐다. 세계경제 장기침체와 중국의 급부상, 일본의 엔저 지속은 수출전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이런 가운데 디플레이션 우려가 지속되는 내수마저 동반 부진에 빠지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상이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이런 상황을 ‘산업성장의 정지(STOP)’로 정리했다. 새해 우리 산업에 샌드위치(Sandwich)·산업경기 회복정체(Traffic jam)·중국발 공급과잉(Oversupply)·엔저에 의한 가격경쟁력 하락(Drop in Price competitiveness)라는 4대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샌드위치 현상은 새해에도 어김없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중일 제조업 경쟁력지수는 2013년 일본(1.09)>한국(1.08)>중국(1.06)으로 전형적인 샌드위치 형태다. 지난 2000년 일본(1.07)>한국(1.06)>중국(1.01)과 비교해보면 중국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우리나라를 따라잡았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7대 주력품목(자동차·조선·기계·철강·IT·석유제품·석유화학)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한국이 2000년 3.4%에서 2013년 4.7%로 소폭 상승하는 사이 중국은 2.2%에서 11.7%로 멀찌감치 달아났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경기 부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발 ‘차이나 리스크’ 역시 지속될 것으로 현대경제연구원은 예상했다. 특히 중국 정부가 철강 및 석유화학 제품에 대해 수입을 줄이려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어, 생산량 조절이 어려운 이들 산업에서 심각한 수익성 악화가 우려됐다. 아베노믹스에 의한 엔저현상도 계속될 전망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새해 원/100엔 환율이 950원으로 50원 하락하면 총수출이 5.8%나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900원으로 하락하면 감소폭이 8.2%로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대외 여건이 부정적인 가운데 내수 또한 회복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새해에는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할 뿐만 아니라 생산과 소비, 투자가 동반 침체에 빠지는 넓은 의미의 디플레이션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물가 하락이 경기침체의 결과라는 점에서 부정적 신호로 인식된다. 2012년 3분기 이후 실제 GDP가 잠재 GDP를 밑도는 ‘디플레이션 갭’이 8분기 연속 나타난 것이 이 같은 예상을 뒷받침한다.
고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 등 고용의 질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내수 회복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주택경기 역시 살아날 것으로 보이지만 가계부채 증가라는 또 다른 악재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경제를 이끌고 있는 전자·자동차 산업이 해외는 물론이고 내수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IT 및 자동차 수출증가율은 2013년 이후 크게 둔화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반면 수입증가율은 2014년에 급증했다. 수입자동차 내수시장점유율은 2015년 15%에서 최고 2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내수활성화 대책은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결국 ‘돈이 돌아야 한다’는데 전문연구기관은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내수 맥박이 살아나려면 동맥경화 상태인 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새해 경제정책방향을 논한 ‘KDI 경제전망 2014 하반기’ 보고서에서 “정부 재정수지 적자폭이 커지더라도 경기회복을 위해 계획된 수준의 일시적 재정적자 확대를 용인하는 등 정부가 적극적인 경기부양책 펼쳐야 한다”고 주문했다. 쉽게 말해 빚이 좀 늘더라도 정부 돈을 풀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대경제연구원도 통화정책에서 저금리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역시 시중에 돈을 많이 푼다는 점에서 KDI 주장과 일치한다. 연구원은 또 내수를 회복하고 원화강세를 약화시키기 위해 새해 상반기 중 정부 재정을 조기 집행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투자 및 소비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규제개혁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과도한 가계대출 부실을 줄이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산정방식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KDI)는 주장도 나왔다.
안정적인 수요확대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처방도 나왔다. 소비가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LG경제연구원은 출산 장려, 이민유입 확대 등 인구 감소를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내수부문에 상대적으로 불리하게 제정된 제도나 경제시스템을 수정할 것을 권고했다. 세제혜택이나 금융지원 시스템 등을 내수산업에 불리하지 않게 수정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LG경제연구원은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수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품질 및 기술경쟁력 향상 노력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외국과 달리 경영 여건이 악화될 때 연구개발 투자를 늘리지 않고 줄이는 국내 관행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높아진 국내 소비자 눈높이에 맞게 디자인 능력을 향상시키고 혁신적인 신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