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도체 산업에서 제조·공정 기술은 핵심 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힌다. 그만큼 보안의 중요성이 높다. 반도체 제조업체는 자사 생산라인의 일부라도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꺼린다. 업무상 생산라인 출입이 불가피한 협력사 직원들이 보안 서약서를 작성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술이 경쟁사로 유출되면 해당 기업으로서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는다. 최악의 경우는 회사 문을 닫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2. 외부 협력사에게 반도체 제조기업의 보안 정책은 엄청난 압박 요인이다. 장비를 공급하는 협력사는 업무 특성상 고객사 기술 정보를 자주 접하기 마련이다. 가령 열쇠를 만들려면 손님 집 문 구멍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협력사 직원들은 보안규정에 맞춰 행동하지만 조금만 실수하면 범죄자로 오인받기 일쑤다. 고객사의 보안 정책은 종종 협력사를 길들이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고객사·협력사·경쟁사로 이어지는 삼성전자·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SK하이닉스의 기술 유출 논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산업기술 보호를 놓고 균형점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핵심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보안을 강화해야 하는 측면이 있지만 보안의 중요성을 강조할수록 외부 협력사에 대한 관리·감독은 강화된다. ‘갑(장비 구매업체)’과 ‘을(장비 납품업체)’ 관계에서 을의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삼성전자 역시 지난 2010년 기술유출 사건이 터진 후 주요 협력사에 자사 지원 전담체제 강화를 요구했다. 협력사 직원들이 여러 회사 업무에 관여하는 것을 막아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정보 공유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객사의 일방적인 보안 정책 강화는 산업 생태계에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의 해묵은 과제인 ‘교차구매’를 가로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를 비롯해 세계적인 장비 기업들은 복수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체에 제품을 공급한다. 우리나라는 삼성·LG·SK 등으로 각각 공급사가 나뉘어 있는 게 보통이다. 고객사들이 암묵적으로, 때로는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경쟁사에 제품을 납품하는 것을 방해하는 탓이다.
장비업체로서는 자칫 기술 유출 구설수에 오를까 걱정돼 스스로 1개 고객사에 집중하는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이처럼 제한된 시장에서 한정된 고객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후방 산업 발전이 쉽지 않은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한편으로는 고객사와 협력사 간에 은연 중에 이뤄지는 기술정보 요구 관행도 개선이 요구된다. 삼성전자 기술 유출 사건에서 피고인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구매기업 일부 직원이 공급업체에 경쟁사 관련 정보를 요구하고, 공급업체가 고객사의 경쟁사 정보를 취합한 정황이 드러났다. 실제로 기밀이 유출되지 않았더라도 이 같은 관행이 존재하는 한 또다시 대형 기술 유출 스캔들이 터질 수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가장 중요한 것은 산업 생태계를 보호하고 육성하는 것”이라며 “기술 유출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자칫 상생을 위협할 수 있는 부분은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획취재팀기자 jeb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