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에 ‘통신시장 238일 천하’ 시절이 있었다. 무선 분야 강자인 SK텔레콤은 2002년 5월 21일부터 2003년 1월 14일까지 유선 분야 1위인 KT의 1대 주주였다. 이 기간 동안 SK텔레콤은 유무선 시장의 최대 주주였다. 그러나 후폭풍이 몰아쳤다. 정부가 ‘SK텔레콤 통신왕국’이라는 독점체제를 막기 위해 유무형의 압박을 가한 것이다. SK텔레콤은 “KT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지만 정부 방침을 바꿀 수는 없었다. 오해와 진실. 2002년 하반기 정부와 SK텔레콤 간 갈등의 핵심이었다.
2002년 5월 22일.
SK텔레콤이 KT 1대 주주가 된 지 하루 만에 정통부는 ‘KT 소유와 경영의 분리’라는 원칙 아래 △KT 정관에 전환우선주 제도 도입 △SK텔레콤의 KT 이사회 참여 배제 △집중투표제 도입 △각종 규제를 통한 SK텔레콤 견제 등의 강경 대책을 발표했다.
정통부는 SK텔레콤이 KT 인수 등으로 시장점유율을 확대하면 SK텔레콤과 신세기통신의 합병인가 조건에 따라 합병 취소 등 특별조치도 강구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그해 5월 24일.
이상철 당시 KT 사장(정통부 장관 역임, 현 LG유플러스 부회장)은 주식 완전매각 후 첫 기자회견을 열고 “SK텔레콤과 주식을 맞교환(스와핑)할 용의가 있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이상철 사장의 회고.
“내부 논의를 거쳐 양사의 상대방 지분 모두를 스와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SK텔레콤이 최대 주주에서 2대 주주로 내려가는 선까지는 주식을 맞교환해야 한다고 제안했어요.”
‘경제 검찰’ 혹은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도 SK텔레콤 압박에 가세했다.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현 원광대 석좌교수)도 5월 24일 KT 민영화 문제와 관련 “SK텔레콤의 KT 지분 취득에 경쟁제한성이 분명할 경우 해당 주식을 공정거래법에 따라 처분명령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양승택 정통부 장관(현 IST 회장)은 하루 뒤인 5월 25일 “SK텔레콤은 KT 2대 주주 이하로 지분율이 떨어질 때까지 매입한 주식을 조속히 처분해야 한다”며 “SK텔레콤이 KT 주식을 처분하지 않는다면 정부 정책에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춘구 당시 정통부 정보통신지원국장(한국전파기지국 대표 역임)의 기억.
“당시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현 그룹 수석부회장)을 만나 ‘주식 처분’을 종용했습니다. 최 부사장은 ‘정해진 룰 안에서 주식을 취득한 것인데 지금은 자금사정상 보유하고 있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민원기 당시 정통부 통신업무과장(현 ITU 전권회의 의장)의 말.
“나는 남중수 KT 재무실장(KT 사장 역임, 현 대림대 총장), 김신배 SK텔레콤 전략기획부문장(SK텔레콤 사장·SK C&C 부회장 역임, 현 SK텔레콤 고문)과 접촉해 해결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SK텔레콤의 KT 대주주 문제는 국회에서도 쟁점이 됐다.
그해 5월 29일 오후 2시 정통부는 KT 민영화 추진 경과를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보고했다.
△김형오 위원장=성원이 되었으므로 의사일정 제1항 KT 민영화 추진 경과 보고를 상정합니다. 해외출장 중인 장관을 대신해 김태현 차관(하나로텔레콤 회장 역임)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김태현 차관=KT 민영화는 정부 지분 완전 매각으로 끝났습니다. 민영화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소유와 경영 분리,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을 강구하고 공정경쟁 조성을 위한 규제 틀을 마련하겠습니다.
△박상희 의원=정통부가 사전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KT 민영화를 추진하다 SK텔레콤이 KT 지분 11.34%를 확보하자 전환우선주 제도 등 각종 규제를 고려하는 모습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원희룡 의원=정통부는 SK텔레콤의 원주 5% 청약을 예상했습니까.
△김태현 차관=현실적으로 그렇게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곽치영 의원=정부가 KT 주식 입찰에 누구든지 참여하라고 발표해 민간기업이 주식을 매입했는데 이제 와서 ‘SK텔레콤, 너는 안 되니까 주식을 팔아라’ 하는 게 타당합니까. 외국기업이라도 정부가 ‘너희는 안 되니까 주식을 팔아라’고 할 수 있습니까.
△김태현 차관=정부 지분은 없지만 여러 가지 통신 관련 법을 통해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고 있습니다.
△김영춘 의원=제도적 장치가 있으면 SK텔레콤에 매입한 주식을 팔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왜 이 난리를 칩니까.
△허운나 의원=정부가 정당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사업목적으로 취득한 민간기업 주식을 팔도록 강요하는 일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동통신사업의 지배적사업자가 유선 분야의 거대기업인 KT의 최대 주주가 되는 일은 거시적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적정수준으로 SK텔레콤 지분을 낮추는 일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종걸 의원=SK텔레콤은 KT 경영권 장악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주식 맞교환 협상에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SK텔레콤이 정부 정책에 정면도전했고 시장 질서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정부가 감정적인 대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한 SK텔레콤 전 고위인사의 증언.
“SK텔레콤이 KT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는데도 정부는 믿지 않고 오해를 하니 답답했습니다. KT 주식을 사라고 해놓고 막상 1대 주주가 되니까 매입했던 주식을 되팔라고 하니 억울하기도 했어요. 애들 장난도 아닌데….”
그해 7월 이상철 KT 사장이 정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이상철 당시 장관의 증언.
“장관이 된 후 표문수 SK텔레콤 사장(현 SK텔레콤 고문)을 불러 ‘서로 불편하니까 빨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했습니다. KT를 국민기업으로 만들어 공정경쟁을 촉진해야 하는 게 정부 방침이니 두 회사 간 주식 맞교환을 하도록 촉구했어요.”
주식 맞교환 문제는 그해 10월 국정감사에도 핫이슈로 떠올랐다. 정통부 소관인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는 물론이고 공정거래위 소관인 정무위원회까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따졌다.
정무위원회는 이용경 KT 사장(창조한국당 대표 역임, 현 KAIST 초빙교수)과 표문수 SK텔레콤 사장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KT 주식 처리문제를 질의했다.
그해 10월 2일 오전 10시 공정거래위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의 국정감사장. 이강두 위원장(한나라당 정책위의장·국민생활체육회장 역임)의 개회선언에 이어 의원들의 질의가 시작됐다.
△박병석 의원=KT와 SK텔레콤은 한국 통신시장의 거목입니다. KT 지분 중 1대 주주가 SK텔레콤이고 KT는 SK텔레콤 주식 9.27%를 소유하고 있죠. 표문수 증인에게 묻겠습니다. KT 경영권을 장악할 의도가 있습니까.
△표문수 사장=그럴 의도가 없고 전기통신사업법, 공정거래법 등 관계법령에 의해 규제를 받아 할 수도 없습니다.
△이용경 사장=SK텔레콤이 KT 경영에 영향을 미치는 발언을 한 적이 있고 여러 가지 우회적인 방법으로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박병석 의원=공정거래위원장은 지금 경영권 장악 가능성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지금 그 가능성을 예의주시하는 상황입니다.
△박병석 의원=지금 두 회사는 주식 맞교환 의사가 있습니까. (이에 두 사람은 그럴 의사가 있으며 현재 방안을 협의 중이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두 업체 관계자는 9월 26일 만나 협의를 했다)
△표문수 사장=두 회사의 주식 맞교환은 증권거래법상 허용이 안 됩니다. 하려면 비용과 절차가 필요합니다.
△박병석 의원=금감원에 유권해석을 의뢰한 결과 증권거래법과 상법에 규정은 없다고 합니다. 관행으로 볼 때 상장법인이면 시간외매매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과거 관행을 참조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세금 문제가 있습니다.
△이용경 사장=세금은 당연히 내야죠. KT는 주식을 맞교환할 의사가 있습니다.
△표문수 사장=우리는 매각 차이가 크지 않아 세금 부담은 미미합니다. 우리도 거래할 의사가 있습니다.
△박병석 의원=그럼 주식 맞교환에 두 분이 동의한다는 뜻입니까. (이에 두 사람이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박병석 의원=두 회사 대표가 주식 맞교환에 나서겠다고 약속한 이상 의지를 갖고 조속히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조재환, 김원길, 엄호성, 박주천, 김부겸, 임진출, 이훈평 의원 등이 이 문제를 거론했다.
이틀 후인 그해 10월 4일 오전 10시.
정통부 회의실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정통부 국정감사에서도 이 문제가 등장했다. 김희선, 이종걸, 조한천 의원 등이 이상철 장관을 상대로 KT 지분에 대한 향후 대책을 집중 질의했다. 이 장관은 답변에서 “SK텔레콤과 KT 양사가 합의를 이루면 주식 맞교환 방안에 제도적 지원방안을 적극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KT와 SK텔레콤은 주식 맞교환 협상에 속도를 냈다. 2002년 11월 14일 KT와 SK텔레콤은 상호 보유 중인 상대 회사의 주식을 맞교환하기로 합의했다. 두 업체는 이를 위한 주식매매 합의서를 체결하고 각각 이사회를 열어 의결했다.
두 달 후인 2003년 1월 14일. KT와 SK텔레콤은 상호 보유지분 매매대금 결제를 끝으로 모든 절차를 완료했다. KT 측은 진정한 의미의 민영화가 달성됐다고 밝혔다. 주식 맞교환으로 정부와 SK텔레콤 간 갈등은 해소됐고 SK텔레콤의 ‘통신시장 238일 천하’도 막을 내렸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