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한국 CDMA가 중국 만리장성을 넘는 대장정이 그랬다. 3년 만에 중국의 빗장이 풀렸다. 대통령의 중국 세일즈 외교부터 정보통신부 장관과 IT기업인들이 다양한 채널에서 중국 시장을 수 없이 노크한 노력의 대가였다. 해외시장 진출에 공짜는 없었다.

2001년 4월 12일.
정보통신부는 양승택 장관이 김대중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4월 14일부터 20일까지 중국과 몽골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양 장관은 방문 기간 중 중국 내 최고위급 인사들과 만나 김 대통령 친서를 전달하고 차이나유니콤의 CDMA 사업 추진에 한중 간 협력과 차세대이동통신 표준에 관한 협력문제를 논의한다고 설명했다. 양 장관은 나차긴 바가반디 몽골 대통령과 남바린 엥흐바야르 수상을 잇따라 면담하고 한국과 몽골 간 정보통신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고 정통부는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이 장관에 취임한 지 20일도 안 된 양 장관을 대통령 특사로 급히 중국에 파견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무렵 차이나유니콤은 CDMA 구축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었다. 중국 CDMA 시장은 시스템과 단말기, 부품을 합쳐 500억달러 이상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김 대통령은 그동안 중국 CDMA 시장에 한국기업 진출을 막후에서 적극 추진해 왔다. 김 대통령이 중국과 CDMA 세일즈 외교를 시작한 것은 1998년이다.
김 대통령은 그해 11월 11일 장쩌민(江澤民) 주석 초청으로 중국을 국빈방문했다. 두 정상은 한중 관계를 `포괄적 동반관계`로 격상했다. 장 주석이 김 대통령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두 정상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 대통령은 13일 중국 베이징에서 주룽지(朱鎔基) 총리와 만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주 총리에게 다섯 가지를 부탁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전 `새벽`에서 밝힌 내용.
“주 총리에게 한국 기업의 중국 원자력발전소 건설 참여, 완성차 조립공장 건립 허용, 한국의 독보적 기술 CDMA의 중국 진출, 중국 진출 금융기관에 위안화 영업 허가, 한국기업의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건설 참여 등을 당부했다. 주 총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약속했다. 중국의 CDMA 채택은 우리 기업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당시 중국은 유럽식 이동통신 방식을 채택하기로 거의 결정한 상태였다.
김 대통령은 1999년 11월과 2000년 11월 열린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해서도 중국에 CDMA 문제를 거론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2000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 남궁석 전 정통부 장관(작고)을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중국에 파견했다. 남 전 장관은 주룽지 총리를 예방해 한중 양국 CDMA사업 협력에 대한 김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중국 CDMA 입찰에 한국기업 참여를 적극 고려해 주도록 요청했다.
김 대통령은 친서에서 “중국의 CDMA산업화에 삼성전자, LG정보통신, 현대전자, SK텔레콤 등 한국기업이 참여해 중국기업과 진정한 기술협력으로 양국 정보통신산업이 발전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남궁석 특사의 중국 방문에는 이기태 삼선전자 부사장(부회장 역임, 현 창조경제포럼 의장)과 서평원 LG정보통신 사장, 박항구 현대전자 부사장(현 소암시스텔 회장) 등이 수행했다.
그해 10월 17일 주룽지 중국 총리가 20∼21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3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내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튿날인 18일 청와대에서 주룽지 총리와 단독으로 회담했다.
주 총리는 이날 “한국기업의 중국 CDMA사업 참여를 희망한다”고 밝혔고 두 정상은 중국 CDMA사업에 한국기업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합의했다. 양 장관을 특사로 중국에 급히 파견한 것은 이런 CDMA 시장 개척의 일환이었다.
양승택 장관의 회고.
“대통령 친서를 가지고 중국 주룽지 총리를 예방한 것은 한국의 CDMA 시스템을 구입해 달라는 부탁을 하러 간 것입니다. 그 전에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몽골 나차긴 바가반디 대통령을 예방했지만 한·몽 간 현안이 없어 상호협력과 우의를 강화하자는 정도의 회의만 했습니다. 몽골에는 KT와 SK텔레콤이 진출해 통신사업을 하고 있었어요.”
양 장관은 그곳에 머물면서 중국 주룽지 총리와 면담일자를 협의했지만 중국 측은 두 번이나 확정했던 면담 일정을 변경했다.
기분이 상한 양 장관이 “만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왜 일정을 바꾸느냐. 면담을 그만두라”고 말했다.
양 장관의 계속된 회고.
“주위에서 누군가가 `중국이 안 만나려는 게 아니라 만나려고 그런다. 만약 만나기 싫으면 다른 일정이 잡혀 있다고 하면서 양해를 구하면 그만이다. 일정을 조정하는 것은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그 다음날 면담일자와 시간이 확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노희도 당시 국제협력관(현 STJ배터리코리아 대표)의 말.
“당시 주 총리와 면담 일정이 확정되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대통령 특사로 와서 총리를 안 만날 수 없다고 중국 측에 압력을 넣었습니다.”
양 장관은 베이징에 도착하자 삼성과 LG 등 기업인들과 만나 중국 CDMA 시장 상황을 점검했다. 양 장관과 우지추안 중국 신식산업부 장관은 과거 수차례 만난 인연으로 격의 없는 사이였다. 그는 8년 전 당시 양 ETRI 원장에게 “다음 정통부 장관은 양 원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그 예언이 성사되는 데 8년이 걸렸다”며 반가워했다.
양 장관은 그에게 “중국이 한국 CDMA 시스템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우지추안 장관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양 장관은 4월 20일 오전 9시 주룽지 총리를 집무실로 예방했다.
양 장관은 주 총리에게 김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한중 간 CDMA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주 총리 면담에는 양측에서 10여명씩 배석했다. 한국 측은 구자홍 LG전자 부회장(현 LS미래원 회장)과 조정남 SK텔레콤 부회장(현 다산네트웍스 고문), 김동연 텔슨전자 부회장(한국금융플랫폼 회장), 강호문 삼성전자 부사장(현 부회장), 이건수 대통령특사 자문역(현 동아일렉콤 회장), 노희도 정통부 국제협력관 등이었다.
양 장관의 기억.
“긴장이 됐다. 어떻게 한국 CDMA 시스템을 사달라고 말할까 내심 걱정하고 있는데 주 총리가 `양 박사는 약전을 해서 강전을 한 나보다 한 수 위`라며 농담을 건넸다. `저도 학부는 강전을 했다`고 대답했더니 주 총리는 `그래도 박사 학위는 약전을 했으니 나보다 한 수 위`라고 다시 말했다(주 총리는 중국 칭화대 전기공정학부를 졸업했다). 주 총리의 발언으로 긴장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확 풀렸다. 주 총리는 `한중 간 무역역조 현상이 심각하다`면서 `이를 해결해 달라`는 등 현안에 대한 발언도 했다. 내가 주 총리에게 `한국 CDMA시스템을 사 달라`고 부탁하려는데 주 총리가 먼저 우지추안 장관에게 `양 박사가 이렇게 멀리 왔으니 한국제품을 사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주 총리와 면담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고 방문 목적도 달성했다.”
바로 이튿날, 차이나 유니콤은 CDMA 시스템 입찰을 실시했다.
입찰 결과, 삼성전자가 중국 CDMA 장비공급자로 확정됐다. 정부와 민간의 수년간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한국이 CDMA 기술 종주국으로 인정받는 일이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중국 상하이(上海)와 톈진(天津), 푸젠(福建), 허베이(河北) 4개 지역 1차분 약 1억5000만달러 규모의 시스템 수출 물량을 확보했다.
1998년 11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작된 CDMA 협력은 두 차례의 대통령 특사파견과 수십 차례의 정부와 기업 간 협의를 통해 3년 만에 한중 CDMA 협력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LG전자는 기술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입찰 예상가를 높게 제시해 아쉽게 탈락했다.
정통부 관계자의 증언.
“삼성은 현지에서 재량권을 가지고 입찰가를 예상보다 낮게 제시했어요. LG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삼성은 1회선당 100~200달러를, LG는 150~160달러를 써낸 것으로 알려졌어요. 승패가 갈린 이유입니다.”
그해 5월 12일 오전.
김대중 대통령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윤종용 부회장(현 국가지식재산위원장), 이기태 정보통신총괄 사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중국 CDMA사업에 삼성전자가 참여하게 된 일을 축하했다. 이 자리에는 양승택 정통부 장관이 배석했다. 김 대통령이 특정 기업 대표와 면담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최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동통신 업계와 정부가 협력해 거대한 중국 CDMA사업에 진출하게 된 것을 높이 평가한다”며 “이번 사업 참여를 계기로 홍콩, 싱가포르, 대만, 인도네시아 등 중화권 진출을 강화해 CDMA의 국제표준화와 동북아 CDMA벨트 구축에 산업계와 정부가 힘을 모아 나가 달라”고 당부했다.
김 대통령은 특히 “우리 경제가 반도체 경기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동통신산업을 반도체와 더불어 양대 주도산업으로 성장시켜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승택 장관은 보고를 통해 “정통부는 올해 이동통신 수출 100억달러, IT 수출 580억달러 달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며 “2005년까지 세계 제1의 이동통신산업 국가를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은 “대통령께서 중국 CDMA 시장을 열도록 해주고 세일즈 외교를 통해 기업들의 해외 시장 개척에 도움을 준 데 감사드린다”면서 “앞으로 국가를 위해 수출을 확대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당초 직접 삼성전자 기흥공장을 방문해 중국 CDMA사업 진출을 격려할 계획이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취소하고 대신 관계자들을 초청했다고 청와대 측은 설명했다. 김 대통령이 중국 CDMA 시장 진출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현덕기자 hdlee@etnews.com













